배후에 대한 사고실험, 그 예리한 상상력(대상작품: 고요한 밤의 눈)

글: 엄수현(25세, 경기도 구리시)

•의심, 상상력, 사고실험

의심은 흥미로운 활동이다. 그것은 일상을 넘어선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세계의 전부인가? 세상의 기저에는 은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내 삶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들은 평범하지도 일상적이지도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쯤 품어봤을 법한 의문이다. 경험적 증거보다는 상상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런 의문들에 “너무 사변적이다.” “근거 없는 망상이다” 등의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런 의심 자체가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상상하는 사람은 생(生)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깊은 늪에 매몰되지 않고, 매너리즘에 잠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작은 의심과 회의로부터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의 도처에서 흔히 발견한다.

물론 의심의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배후’, 또는 ‘근원’에 대한 의심이다. 어떤 것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어떤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근원과 배후에 대해 의심을 던지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에게는 의심이 불필요하며, 사유를 할 수 없는 동물에게는 의심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불필요함과 불가능함의 중점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세계의 배후를 궁금해하며, 상상한다. 현실에 드러나지 않는 이면에 대한 이러한 상상을, 우리는 일종의 사고실험(思考實驗)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고실험의 대표적인 산물이 바로 소설이리라.

『고요한 밤의 눈』은 현대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주제로 한 하나의 사고실험으로 볼 수 있다. 작가 박주영은 예리하면서도 독창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충분히 가능할 법한 하나의 현실을 소설 속에서 그려낸다. 물론 작가가 구현해 낸 이 현실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이질감으로부터, 정말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세상의 배후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작품에서는 어떤 사고실험이 수행되고 있는가? 작가는 사회와 인간의 배후에 무엇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대상 수상자 엄수현(25·경기도 구리시) 씨. 현재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4학년이다. 수현 씨는 “스스로를 전문적 독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발적 독자나 겨우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부족한 인간이 쓴 - 비평이라 말하기도 어색하고, 전문적 평론은 더더욱 못 되는 이 부끄러운 감상을 좋게 읽어 주셨다니 깊이 감사드린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찰나의 즐거움이라도 주었다면 비록 졸문이라도 기쁜 법이다. 글은 결국 ‘가식과 위선으로 덮인 세상에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자기 진술의 방법’이다. 그리고 지금껏 배우고 공부한 것들이 적어도 죽은 지식은 아님을 알려오는 脈이기도 하다. 그것을 원고를 쓰며 체감했다. 나는 영리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세상 물정이나 사회의 논리는 잘 모르고, 그저 읽고 쓰는 일에 즐거워하는 어리숙한 사람이다. 그런 내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들께, 그리고 나의 미성숙을 용인해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적어도 나쁜 인간은 되지 않겠다고 지면에서나마 약속한다.”라고 소감을 남겼다.

•예비 작업 – 에필로그와 프롤로그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 상당히 흥미로운 형식상 특징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작품은 “나는 스파이이고, 이 세계는 끝났다.(p.9)”라는 에필로그로 시작해서, “나는 스파이이고, 이 세계를 위해 다시 태어났다.(p.314)”라는 프롤로그로 끝난다. 응? 독자는 작품의 처음부터 자신의 지식 체계에 의문을 품게 된다. 소설 작품은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요한 밤의 눈』은 그 순서를 역전시킨다. 그렇다고 작품 줄거리가 완전히 역순행적 구조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독자를 흥미롭게 하면서도 당혹케 하는 이 설정은, 오히려 작품의 결말은 중요치 않다는 작가의 전언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에필로그는 대개 서사를 종결하고, 소설적인 결론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 에필로그가 가장 앞에 배치되었다. 이는 결국 소설적 결론이 아니라, 서사의 과정에 주목해 달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기-승-전-결의 선형적 서사 흐름보다는 본문에서 그려지고 있는 이미지들이 더 중요하다는 은밀한 부탁이 아닐까? 끝과 시작은 바뀌어도 문제가 없다는 것 – 그렇다면 그 중간 과정이란 무엇인가?

•누구도 아닌, 무엇도 아닌

“이 세상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기억과 양심, 진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도.(p.13)”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당황하게 되는 지점은, 인물에 대한 정보가 도대체 명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 이름부터가 그렇다. “세상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D로부터 X, Y, Z, B… 이들에게도 분명 이름은 있을 터인데, 그들은 알파벳으로만 지칭된다. 그리고 그들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사실상 없다. 이 인물들은 세계 배후에 존재하는 미지의 힘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되며 감시당한다. 게다가 명확한 사인도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일거수일투족이 보고서의 형태로 정리되고, 심지어는 집필하는 소설의 어휘까지 검열당한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무기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삶을 튼튼히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체성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자율성도 없다. 결국 작품 속의 인물은 ‘누구도 아니다.’ 그들의 삶에는 고유한 존재의 값이 말소되어 있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미지의 스파이 집단이 어떤 목적으로 활동하는지는 대체 오리무중이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지시사항 – 거칠게 요약하자면 ‘일탈 및 혼란 방지’ - 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스파이들은 위계질서와 명령에 충실할 뿐, 인간성이나 주체적(비판적) 의식은 사실상 상실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것은 소설을 쓰는 Z나 등록조차 되지 않은 D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일은 ‘무엇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삶에는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

“불행과 무기력에 중독되어 좀비들처럼 걸어 다녔다.(p.142)”는 문장은 누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소설 속 인물들을 집약적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이것이 단지 소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 인물들의 이름은 사실상 비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름이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과도한 상상일까?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가,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 소설은 지금 여기의 알레고리가 아닐까?

•무감각증과 그 배후

“가장 덜 양심적이고 덜 진지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이 틀렸다고 느끼면서도 더 이상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p.45)”

만일 정말 세계의 배후에 변혁과 혁명, 질서의 전복을 방지하기 위해 조직된 스파이 단체가 있다면 그들이 가장 반기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현재의 질서에 순응하고, 어떠한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더라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이 세상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고, 변화는 있을 수 없고, 세상은 늘 그렇다. 강자는 강자로 태어나고, 약자는 약자로 살아갈 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그들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p.126~127)”라는 말은, 결국 순응주의가 누구의 이익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가장 많은 이익을 받는 사람들은 변혁을 원할 리가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움직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원망해야 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뿐이다.(p.209)”처럼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이념을 주입한다거나 “목적을 달성시키지 못하면 도태되었고 순위권에서 밀려나면 생존이 어려워지는(p.273)” 사회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당연히 “왜 그래야만 하느냐는 질문은 사치였다.(p.273)”라고 생각하게 되며, 사회체제와 배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경종(警鐘)이다. 명백한 사회 부조리나 모순 앞에서, 나는 무엇도 하지 않고 비겁하게 침묵하지는 않았는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으로, 나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왜’라는 의문을 치워 두지는 않았는가? 목적만을 추종하는 나의 맹목이, 세계 배후에 있는 미지의 세력만 좋게 한 일은 아니었는가? 작가의 예리한 상상력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회고하게 만들며, “그래서 자살은 당연한 것이다.(p.209)”라는 비인간적인 명제가 바로 우리 자신의 무감각증으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묻는다.

•영웅주의가 아닌 패자의 서, 그리고 사랑

그렇다면 이런 세계는 어떻게 구원되어야 할까? 한 명의 영웅이 나타나서 모든 스파이들을 척결하고, 세계의 배후에서 이익을 축적하고 있는 거대한 악을 뿌리째 뽑아내고, 모두가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도록 인도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고전소설적인 방법은 아주 시원하고 통쾌하다. 그러나 동시에 씁쓸하다. 영웅주의에 바탕을 둔 해결은 가장 극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무기력한 법이다. 그 방법은 현실로 실현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신적 위안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작가는 환상적 세계의 영웅 대신, 지극히 인간적인 제안을 건넨다. 첫 번째 제안은 바로 글이다. 글은 결국 가식과 위선으로 덮인 세상에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자기진술의 방법이다. 물론 세상의 많은 글들은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 이런 글에는 패자가 없다. 작가는 그래서 ‘패자의 서’를 마련해 둔다. 이 글은 승자의 이야기만 쓰이는 역사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가 쓰일 수 있는, 그 중에도 패배자의 이야기가 온전히 기록될 수 있는 ‘패자의 서’다. 이것은 기억과 양심, 진실이 소멸되는 시대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고, 개인의 존엄과 실존을 보장하는 영토가 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패자’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패자의 서는 앞으로 쓰일 책, 우리 모두가 쓰게 될 책이다.(p.310)”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피우는 장미가 모여 백만 송이 장미가 된다.(p.309)”

그리고 사랑이 있다. “진부하지만 늘 사랑은 정답이죠.(p.287)” 여기서의 사랑은 물론 연인 간의 사랑도 의미하지만, 인간 사이의 본연적인 인간애(人間愛)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스파이에게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고, 연인이란 불필요를 넘어 불법에 가까운 것이지만, X와 Y는 진부하지만 따뜻한 그 무엇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지 연인 사이가 아니라 사람 사이로 확산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럴 때 “나도 이곳의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아무도 알고 싶지 않다.(p.99)”는 슬픈 독백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p.287)”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따뜻한 선언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사고실험의 종착지 – 그래서?

『고요한 밤의 눈』은, 예리한 상상력과 깊이 있는 사유가 빚어낸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이 실험은, 이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가능성 – 우리의 현실과는 상이하지만 그렇기에 지적인 자극을 주는 이 가능성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해볼 수 있다.

전술했듯이, 배후와 근원에 대한 상상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배후와 근원을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소설은 상상력을 동원해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바로 그 배후와 근원을 탐색해 보려 하는 하나의 사고실험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보여주는 상상력은 흥미롭다. 물론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보니 비교적 읽기가 불편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기에 서사가 주는 긴장감이나 몰입도가 조금 부족한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전체적으로 조망했을 때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한다는 느낌은 비교적 약한 편이다.

허나 이 소설이 시도하고 있는 사고실험, 이 소설이 그려내는 시대상, 이 소설이 품고 있는 사유와 깊이는 그 아쉬운 지점을 충분히 보완해 준다고 느껴진다. 개인에 매몰되어 그 개인을 둘러싼 맥락을 무시하는 글도 많고, 사회나 거대 담론에 천착하여 그 안의 개인을 경시하는 글도 적지 않다. 허나 개인 없는 사회, 사회 없는 개인은 둘 다 무의미하기 마련이다. 『고요한 밤의 눈』은 그 두 요소를 균형감 있게 다루면서, 인간과 정치 구조의 연관성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평소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삶과 세계에 대해 진중하게 사유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것이 『혼불』이 품은 진중한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멋진 작품으로 『고요한 밤의 눈』을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상에 치여, 자기 앞의 삶만을 맹목적으로 좇는데 급급한 현대사회다. 그런 삶 속에서 『고요한 밤의 눈』과 같은 작품은 하나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매너리즘과 무감각증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삶과 세계를 조망해보는 일. 그리고 그 배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모순과 부조리함, 무감각증에 대해 성찰해보는 일.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유의미한 경험이다. 많은 사람이 『고요한 밤의 눈』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실존적으로 성찰해보기를,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화(化)된 의미를 찾아내기를 소원한다.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혼불의 메아리 대상 수상작품

•주최: ㈔혼불문학 다산북스 전주MBC

•주관: 최명희문학관 혼불기념사업회

•후원: 전라북도 전주시 남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