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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16. 내 그림자 2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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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9  10: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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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가방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잘 되었다. 어머니가 논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새 가방 사내라고 떼를 썼다. 아버지 회초리가 무섭긴 했지만 모레까지 가방을 안 사주면 학교에 안 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 본문 중에서

2.

  학교 가는 게 나는 물론 싫었다. 숙제하기도 싫었고 선생님께 매 맞는 것도 지겨웠다. 멍청하면 꾀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부터, 가난한 집 아이가 머리는 영리하다는데 너는 대체 왜 이러냐는 말까지 무밥처럼 싫었다.

멍청한데 어떻게 꾀가 생길 수 있는지 가난한 거하고 영리하다는 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선생님은 말씀해 주지도 않았다.

4학년 때부턴가 목요일엔 특별활동반이란 게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각자의 특기를 살리는 수업이었다. 그림그리기반 붓글씨반 배드민턴반 등등이 있었는데 그 속에 보이스카웃반도 있었다. 나는 저학년 때부터 이들을 유심히 봐왔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었고 그 위에 반바지를 입었다. 그들만 신을 수 있는 운동화며 그들만이 입을 수 있는 감청색 유니폼은 가히 내 눈알을 잡아뺄 듯이 유혹적이었다. 그들 옆에서 생글거리던 걸스카웃 여자애들은 또 어떤가. 치마 입은 유니폼도 예쁜데 얼굴 생김이며 몸매 또한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방학 땐 캠핑도 간다는데 거기서 걸스카웃반 지지배들과 폼 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김치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그 반에 들어가려면 유니폼을 살 만한 경제력을 갖춘 집 자식이어야 했고 공부도 잘 해야 했다. 공부는 좀 못하더라도 적어도 경제력은 갖춘 집 자식이어야 했다.

나는 씨름반이 되었다. 왜 내가 씨름반이냐고 선생님께 여쭐 계제가 나는 못 되었다. 맨날 검정고무신만 신고 다닌 데다가 얼굴은 콩장이었고 공부도 못하는 반편이었으므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생님 뜻이 곧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공부는 그만두고 유니폼을 살 만한 돈이 없는 집 자식이기 때문에 씨름반에 들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들놈은 씨름반에 들 수 없나요? 이렇게 묻지도 못하고 학교 운동장 구석에 박혀 있는 씨름장에 갔다. 

 

   
나는 씨름반이 되었다. 왜 내가 씨름반이냐고 선생님께 여쭐 계제가 나는 못 되었다. 맨날 검정고무신만 신고 다닌 데다가 얼굴은 콩장이었고 공부도 못하는 반편이었으므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생님 뜻이 곧 법이었으니까.  ··· 학교 운동장 구석에 박혀 있는 씨름장에 갔다. 마음속에 욱하고 올라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 본문 중에서

마음속에 욱하고 올라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보이스카웃반에 든 애들은 특별한 사람들 같았고 나는 평생 씨름 샅바나 맬 수밖에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특별한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 훗날 알았지만 그때의 자괴감은 나와 학교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분명했다.

 

  그때 마침 가방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잘 되었다. 어머니가 논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새 가방 사내라고 떼를 썼다. 아버지 회초리가 무섭긴 했지만 모레까지 가방을 안 사주면 학교에 안 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대답은 이랬다. 지금은 모내기철이니 장에 갈 수 없다, 며칠만 책보에 책을 싸가지고 다녀라, 가방은 꼭 사주마, 옛날엔 모두 책보를 들고 다녔다, 뭐 이런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대답을 듣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검정고무신은 신었을망정 책보 들고 학교에 가는 학생은 전교생 중에 나 혼자일 것이었다. 그 이틀 뒤 아침 학교에 안 가겠다고, 못줄이나 잡겠다고 나는 떼를 썼다.

보이스카웃반에 못 든 것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방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으로 알고 아버지의 회초리가 사정없이 종아리에 감겼다. 그래도 버텼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작대기를 들고 오는 게 아니냐.

별 수 없다. 매에는 장사가 있을지 몰라도 작대기질에는 장사가 없을 거니까. 아버지 작대기질에 맞아죽는 것보다는 학교를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회초리에 감겨 따끔따끔한 종아리를 끌고 손잡이 떨어진 책가방을 안고 등굣길에 나섰다.

 

  그런데 책가방을 보퉁이처럼 안고 가야 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학교에 가는 애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가방 살 돈도 없냐, 이러면서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가방은 아무 짬도 모르고 에미 품에 안긴 돌배기처럼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몸체에서 떨어져 덜렁거리는 끈은 아이 다리 같았고 반원으로 온전한 끈은 아이 머리 같았다.

젖 달라고 보채는 이것을 팽개쳐버리지 못하고 낑낑대는데 내 속내를 짐작한다는 듯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세 발 가옷은 너끈한 새끼줄이었다. 지체 없이 새끼줄로 책가방을 통째로 묶고 끈을 내어 어깨에 걸쳤다.

가방을 땅바닥에 내던져 질질 끌고 앞을 향했다. 자, 볼 테면 봐라, 학교는 이렇게 다니는 거다.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등굣길을 휘저었다.

방죽밑이 신 씨네 점방을 지나 방앗간을, 노락쟁이를, 뽕밭을, 학산을, 길이란 길을 죄다 지워버릴 듯 가방을 질질 끌며 지나쳤고, 학교가 파하면 그 역순으로 집에 돌아왔다.

또래들은 내 행동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 자랑스럽게 가방을 질질 끌면서 누구든 만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집에 갈 때도 가방을 질질 끌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또래들의 표정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정말로 너 왜 이러냐는, 죽으려고 환장한 것 아니냐는, 사람 되기 글렀다는 표정이 역력했던 것이다.

 

  꼬박 닷새 이렇게 등하교길을 휘저었다. 토요일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아주 부드럽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어떤 놈이 내 행동을 선생님께 꼰지른 것이다.

매품 팔러 온 흥부처럼 나는 기가 팍 죽었다. 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은 매가 아닐 것이다. 몽둥이찜질일 것이다. 선생님은 청소함 속의 몽둥이를 꺼내어 닥치는 대로 휘둘러댈 것이다. 자기 분을 못 이기고 슬리퍼를 벗어서 싸대기를 후려칠 수도 있다. 나를 들어서 창문 밖에 메다꽂을 수도 있다.

이렇게 조용히, 부드럽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부를 때는 곡哭소리가 나야 매타작이 끝났으니까.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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