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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16. 내 그림자 1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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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6  13: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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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애다운 연애도 못 해보고 멍든 세월이 비단 내 사정만은 아니겠지만 전북대 근처 모 고시학원에서 수업할 때의 일이다. 

키가 작고 못 생겨서 여자에게 딱지 맞는데 이골 난 나는 이번만큼은 얼병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겠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있을 때였다. 남들이 다하는 결혼을 나도 해보려고, 이 못난 나를 이틀거리로 호출해대는 여자랑 제대로 된 사랑 한번 해보려고 애가 타고 있었다.

봄밤이었다. 음악이 잔잔하게 깔리던 호프집, 조금 늦었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는 늘씬한 허리를 뽐냈다.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인 얘기들을 비싼 안주처럼 모시며 잔이 비워지고 우리 얼굴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진달래 피고 나면 개나리 피고 그러고 나면 철쭉이 피고 4월 말이나 되어야 목련이 벙글었는데 요즘은 요것들이 순서도 없이 앞다투어 막 피어난다는 얘기를 우리는 도란거렸다. / 본문 중에서

고등학생 때만 해도 진달래 피고 나면 개나리 피고 그러고 나면 철쭉이 피고 4월 말이나 되어야 목련이 벙글었는데 요즘은 요것들이 순서도 없이 앞다투어 막 피어난다는 얘기를 우리는 도란거렸다. 

그런 꽃만 꽃이겠냐고, 보고 싶으면 시도 때도 없이 마구 피어나는 그런 꽃이 사내에겐 있다고, 한번 볼 테냐고 눙치면서 킥킥거리면서 봄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너, 병초 아니냐?”

손을 무작정 흔들면서 다가온 녀석의 얼굴을 살펴보니 초등학교 동창 양석길이다. 짜식은 좀 앉겠다는 양해의 말도 없이 무작정 손을 흔들 때처럼 그녀 옆에 앉아버렸다. 그러더니 그녀가 누구냐, 뭐하고 지내냐고 자신은 삼양사에 다닌다고 혼자 북 장구를 쳤다. 

나는 학원 국어강사라고 야간수업 끝내고 목이 컬컬해서 한 잔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석길은 눈이 단박에 똥그래졌다. 그럴 리가 있냐고, 정말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냐고 차마 못 믿겠다는 눈빛을 붙여오더니,

“그려어? 나는 지금쯤 니가 나이트클럽 대여섯 개, 빌딩 서너 개는 가진 중간보스는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이러더니 금세 국어강사를 잊어먹고 동창 누구는 어떻고 어디에 살고 그때 담임선생님들 근황까지 곁들이며 담뱃불 댕길 여유도 없이 입똥내를 튕겼다. 그리곤 무슨 비밀스런 얘기나 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너, 가방 손잡이에 새끼줄에 매달아서 질바닥에 질질 끌고 다녔던 거 기억 나냐?”

이러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와 어떤 사이인지 앞으로 우리 둘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녀석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와 혼인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녀 앞에서 내 자랑은 못해줄망정 짜식은 촛병을 통째로 엎지르고 있었다. 나는 호프를 꿀컥꿀컥 마셨다. 

말을 받아줬다가는 뭔 얘기가 튀어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호프 잔을 딱 소리나게 내려놓고 그런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 말마라, 너 그랬다. 전교생이 다 아는 일을 어칫게 당사자인 니가 모를 수 있냐...?”

   
 봄밤이었다. 음악이 잔잔하게 깔리던 호프집, 조금 늦었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는 늘씬한 허리를 뽐냈다.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인 얘기들을 비싼 안주처럼 모시며 잔이 비워지고 우리 얼굴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본문 중에서

  녀석은 눈을 세모꼴로 세웠다. 동창들은 나를 만나면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일들을 신통방통하게 쏙쏙 끄집어냈다. 그럴 때마다 그런 적이 있었냐고 같이 깔깔댄 적이 많았다. 

때론 내가 안 한 일을 내가 한 일로 기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코흘리개 얘깃거리이므로, 주인공 그까짓 게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기꺼이 웃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가방 사건 당시 나는 4학년이었다. 여자 동창들 치마를 들추거나 고무줄 끊어먹거나 돌막자들을 빼앗아 똥통에 던져버리는 정도는 사실 내 놀이깜이 되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과 무협영화를 흉내 내느라고 쉬는 시간마다 육박전을 하고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흘겨만 봐도 시들어버릴 것 같은, 손수건처럼 접어서 안주머니에 꼬옥 담고 다니고 싶은 아름다운 여자 앞에서 책가방을 길바닥에 질질 끌고 다닌 얘기를 꺼내다니.

  “왜, 속이 거북하냐?”

분위기는 망가졌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추스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짜식은 언제 우리가 만났냐는 듯이 제 동료를 만나자마자 저만치 새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알을 빛내면서 물개똥 싼 팬티를 농틈에 처박아버린 사연을 대라는 듯 코흘리개 시절을 졸랐다. 제일 예쁜 여학생이 누구였냐고 캐묻기도 했다. 난처하기만 했다.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그녀를 만난 것이 아니기도 했지만, 느닷없이 과거로 돌아가서 아직 곁가지도 못 추린 내 유년기가 누군가의 얘깃거리가 된다는 게 싫었다. 

누구든 과거가 없고 추억이 없으랴. 파란만장하지는 못하더라도 목 가래톳 세울 법한 일은 누구든 몸에 지니고 살지 않은가. 과거의 일들을 그냥 지나쳤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든 그것이 얘깃거리가 되려면 현재적 욕망이라는 거울을 통과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봄밤 분위기는 망가졌다. 오늘 밤 사내가 가진 불꽃이 무엇인지를 그녀에게 꼭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다음에 가르쳐 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몇 마디 지껄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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