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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10. 크림빵과 노인2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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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1  15: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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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운터에 서 있던 여직원을 따라 나온 노인은 나를 못 알아보고 어리둥절했다.

“어젯밤 크림빵 못 사먹은 놈이에요.”

공손하게 말문을 뗐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이냐, 불같이 화를 내며 내칠 줄 알았던 노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내 손을 반갑게 잡아주는 것이 아니냐.

“그려, 젊은 놈이 이래야지.”

노인은 내 입장이 어떤지도 모르고 얼굴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창 공부해야 할 놈이 초저녁부터 취해설랑 얼굴이 시뻘게 가지고 길거리를 싸돌아다녀서야 쓰겠느냐, 힘이 들수록 어금니를 더 악물고 꿈을 뼈에 새겨야지. 술은 기분 좋을 때 먹는 것이지 화풀이 깜으로 먹는 게 아니다. 어디 사는고? 시방 뭐를 준비하는고?

   
나는 말없이 제과점을 나왔다. 노인 앞에서 시집에 사인을 하고 싶었던, 그 시집을 도로 들고 나와서 한벽당 쪽으로 그냥 걸었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나는 글공부를 한다고 말했다. 어젯밤 왜 나에게만 빵을 안 팔았냐고, 그 이유를 말해 달라고 따질 수 없었다. 노인의 어진 표정에 녹아버렸던 것이다. 앞으로 내가 뭐를 하고 살든 힘껏 응원해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던 것이다. 글을 열심히 쓰겠다고 술도 함부로 안 먹겠다고 인사하고 물러섰다. 노인은 큰 비닐봉지에 빵을 한보따리나 챙겨주었다.

 

글은 뜻대로 써지지 않았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타고난다는 몽당빗자루 같은 통념을 깡그리 무시하는 데가 내 글쓰기의 시발점이었지만 써놓고 보면 신세타령에 불과했다. 글의 헛발질이 뭔지도 모르고 시간은 순식간에 몇 년을 까먹어버렸다. 못 먹는 술에 곤죽이 되어 새벽까지 토악질했던 어느 새벽, 먹을 게 있어야 글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원가를 떠돌았다. 밑줄 거요, 밑줄. 이거 시험에 나오는 거라니깐! “지식 소매업자”라는 글귀를 청춘의 문패로 삼고 문전 문전을 떠돌았다. 전주에서는 ‘전주고’를 안 나왔다고 무시당했고, 서울에서는 ‘서울대’를 안 나왔다고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날들에까지 버림받으며 하루에 14시간도 수업을 했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시詩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 2003년 5월에 첫시집『밤비』를 냈다. 중앙 일간지들이며 전북의 일간지들에 내 얼굴이 인쇄된 시집 기사가 떴다. 친구들, 선후배들에게서 축하 전화가 걸려왔다.

아, 이렇게 한국의 시단이 뒤집어지는구나. 시집『밤비』는 불티나게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고 나는 사인을 요청하는 독자들 등쌀에 행복해지겠구나. 나도 인세印稅라는 것을 두툼하게 받아서 누구에게든 술 한 잔 거하게 살 수 있겠다.

쩝쩝 입맛 다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시집이 나온 뒤 석 달이 지나도록 출판사에서 2쇄를 찍자는 말이 없었다. 날마다 나는 기가 팍팍 죽어갔다. 시집 이름이 ‘밤비’여서 그랬는지 그해 여름은 정말이지 미치도록 비가 쏟아졌다.

 

   
 2003년 5월에 출간한 첫시집『밤비』.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난 뒤였을 것이다.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 해 추석 무렵 그 노인이 생각났던 것이다. 정종 한 병과 시집이 담긴 봉투를 들고 풍년제과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시집은 안 팔렸어도 노인께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말씀드릴 참이었다.

“그 어르신 돌아가셨어요.”

비닐봉지에 빵을 담다 말고 여직원이 말했다. 나는 말없이 제과점을 나왔다. 노인 앞에서 시집에 사인을 하고 싶었던, 그 시집을 도로 들고 나와서 한벽당 쪽으로 그냥 걸었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과 노인이 아직도 예전 모습일 거라고 착각한 내 정지된 기억을 뒤꿈치로 까뭉개고 싶은 순간이기도 했다.

15, 6년 전 그날- 내게 다가온 노인의 말씀이 구태舊態에 젖은 내 삶을 갱신할 수 있도록 뼈저렸던 것도 아니고, 내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무정함이 이런 것인가 싶게 내 마음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말 많던 ‘6‧29 선언’이 ‘속이구 선언’이 된 뒤에 세상은 변했던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던가.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따져보지도 못하고 시간은 이마를 넓혀가며 앞만 향했다.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나는 이렇다 내놓을 게 없고, 바람과 햇살과 시냇물소리를 닮은 글줄을 잡아보기는 커녕 여태 문단 말석에서 붓방아나 찧는 반편이 신세를 못 벗어났다. 산다는 게 뭔지, 이거 참, 쓴입맛 다시며 소주 한잔할 때면 그 노인이 생각나곤 했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그랬을 것이었다. 아니다, 삶의 허망감을 못 견디고 어딘가에 기대고 싶을 때 문득 그 분의 안부가 궁금했을 것이었다. 나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분. 젊은 나와 맞장 뜨겠다고 팔뚝을 걷어붙이셨던 분. 나와 딱 두 번 마주쳤던 분. 빼빼 마르셔서 그랬는지 눈이 맑아보이셨던 분. 나를 까맣게 잊고 사셨을 어르신-.

나는 아직도 노인의 성함을 모른다. 풍년제과점의 사장님이었는지 직원이었는지 그것도 모른다. 아직도 관통로 사거리에 있는 풍년제과점- 거기 관계자를 만나본 뒤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며 누구를 칭송할 만큼 내 글의 품은 넓지도 못하다. 그러나 오늘처럼 햇살이 맑은 날이면, 이런저런 세상일 밀어두고 그냥쟝 혼자 있고 싶을 때면- 크림빵이라는 말 옆에 아직도 서 계시는 노인이 생각나곤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제자이자 스승”이라고 적었던 누군가의 글귀와 함께.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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