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니가 내 비위를 슬슬 맞추려드는 것 같았다. 아까 보니까 계란을 삶던데 이건 분명히 내 몫일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삶은 계란을 동생들까지 주려면 그 귀하다는 계란이 무려 다섯 개나 필요하다. 그런데 분명히 한 개만 삶았다. 내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는 거다.

추석이 코앞에 다가온 9월 중순. 어머니는 어제 청닛날 밭에서 빨간 고추를 일곱 푸대나 땄고 오늘은 품을 셋이나 사서 수랑둘밭 고구마를 무려 사십 푸대나 캤다. 그리고 이것들을 이미 리어카에 실어 놓았다. 내일은 일요일, 새벽에 리어카를 끌고 중앙시장에 내갈 일꾼이 필요한 것이다.

“큰아야, 내일 엄마 좀 도와주라잉? 아부지는 늘 바쁘시잖냐.”

전주 팔복동의 명물인 이팝나무 철길.

김이 모락거리는 고구마 서너 개에 계란 한 개가 든 작은 소쿠리를 들고 어머니는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거절했다. 내일 오전에 친구들과 비석날 사과과수원 밑 둠벙에서 낚시질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붕어를 못 낚으면 수대로 둠벙물을 품어먹기로 친구들과 단단히 약속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가 도저히 뿌리치지 못할 제안을 했다. 추석에 입을 새 옷을 사준다는 거였다. 나는 귀가 번쩍 띄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못 지킬 것이라는 느낌이 눈앞을 스쳤다. 그러나 거절을 한 번 더 했다. 너무 쉽게 부탁을 들어주면 앞으로 나만 피곤해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 집에서 중앙시장에 오가는 길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왕복 10킬로미터가 짱짱한 데다, 그 길 도중에 내가 좋아하는 숙이네 집 앞 새터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머리에 헌 수건을 썼고 키도 작고 신발은 낡아빠진 고무신을 신은, 햇살에 익어서 얼굴이 검붉으셨던 내 어머니를 숙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추석에 입을 옷을 사주신다는 제안은 내 입맛을 돋우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친구들과 한 약속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느낌조차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때는 새옷을 얻어 입을 때가 추석과 설뿐이었다. 그런데 새옷 사달라고 조르기도 전에 그것을 사주겠다고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내다니. 숙이와 우리 모자가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제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거나 제 삼촌들이 벌초하는 데 따라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다시 거절하는 척 정색을 하고

“정말로 새 옷 사주는 거여?”

라고 말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는 걱정 꽉 붙들어 매라고, 내가 언제 빈말하더냐고 틀림없이 사주마고 단단히 약속을 했다. 하긴 어머니와 어떤 약속을 했을 때 내 성에는 못 미칠망정 기대에 아주 어긋나게는 하지 않았었다.

없이 사는 집안이지만 나는 명색이 장손이니까. 서울에서 할아버지께서 집에 오시면 당신과 유일하게 겸상을 하는 빛나는 얼굴이 바로 나였으니까. 나를 홀대하는 것은 할아버지를 함부로 대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믿고 나는 리어카를 끌고 중앙시장에 가기로 했다.

새옷 사준다는 말에 흔들려 버린, 친구들과 한 철석같은 약속을 저버린 내 지조 없는 마음을 못 떼어내고 리어카는 방죽미티를 지나 전주제지 후문이 있는 지름길을 탔고, 상리와 새터를 지났다.

전주 중앙시장 풍경.

숙이는 다행이 안 만났다. 하지만 길은 아직도 멀었다. 전주대교(지금은 추천대교이다.)를, 덕진 공설운동장을, 서중학교 옆에 있는 분수대를 지나니 중앙시장에 들어가는 초입이 보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리어카를 들이대기는커녕 발 디딜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사정이 이럴지라도 육교나 중앙성당께로 조금씩 리어카를 들이밀었다. 거기로 가야 제대로 물건을 팔 수 있었다. 거기가 시장의 한가운데니까. 운동회 날이나 보았던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뭐라고, 뭐라고 떠들어대는 북새통을 뚫고 조금씩 길을 터갔다. 마주 오는 리어카가 우리 앞을 막아서기도 했지만 간신히 길을 비키며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추석장이 단대목이라더니 조금씩 길을 트는 사이사이로 우리 고구마와 고추가 팔리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어머니가 중앙시장 맨바닥에서 깻잎이나 부추를 늘어놓고 팔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사람들이 우리 고구마와 고추를 보고는 값도 안 깎고 사갔다. 낼 모레가 추석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날마다 추석 단대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육교를 지나 중앙성당에 닿기도 전에 리어카 위에 실린 것들이 죄다 팔렸다.

“밥 먹자. 머 먹을래?”

말할 것도 없이 짜장면이다. 곱빼기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어머니가 먹고 있는 우동을 나눠서 또 먹었다.

이제 옷 사러 가야 할 참이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