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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강은 햇살을 받아 제 모습을 얼른 내보이지 않는다. 2월의 강이니 춥기도 하련만 누대를 걸쳐 얼어본 적이 없다는 듯 쉴새없이 물결을 기슭으로 보낸다. 누군가도 나처럼 이 의자에 앉아서 강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올 겨울에는 눈이 펑펑펑 내려서 지나간 날들이 설원처럼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리라.

허드슨 강은 하늘빛을 받아낸 듯 푸르다. 쌍쌍이 강변에 나온 사람들은 강의 추위도 잊고 이어폰을 나눠 꽂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춘다. <본문 중에서> / 허드슨강 너머로 보이는 뉴욕의 풍경.

강을 따라서 줄지어진 나무들에 눈비가 들이친 뒤 꽁꽁 얼어버리면 동화 속에 나오는 눈꽃나라가 되겠지. 그 싱싱한 상상의 가지 옆에서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삶’이라는 단어를 만나고, 순식간에 앞이 깜깜해졌다 환해졌다 다시 깜깜해지는 쾌감도 맛보며 혼자 견디어 온 삶의 토막들을 강바람 타는 햇살에 말리기도 했으리라.

미국인이 된 네가 옆에 있다면 이쯤에서 한 마디 할 게 틀림없다. 뉴저지까지 와서 한국의 불행했던 근대사를 들먹일 거냐고 발끈할 것이다. 뉴욕의 퀸즈에서 여기로 빠져나오기까지 기댈 곳조차 없었던 미국살이를 한번 들어볼 테냐고 너는 바짝 다가앉을 것이다.

뉴저지의 도서관은 어떤 분위기인지 커피 맛은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 시장에 벌여진 물건들의 생김생김을 살펴보면서 며칠만이라도 한국의 시간을 잃어버리면 좋겠다고 천천히 내 눈 속을 살필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 물결은 체로키 부족의 삶을 담은 멜로디를 타고 반짝인다. 1971년에 발표되어 1백만 장 이상 팔렸다는, “살자니 자존심 상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한다.”라는 징후가「인디언 보호구역」이란 제목을 달고 가슴에 아프다.

북미의 주인이었던 인디언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세운 나라, 생태계 보호란 구호를 앞세워 멸종되어 가는 종種들을 살려내는 이면에 20세기에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을 인디언들처럼 학살한 나라, 미국. 보호구역을 못 벗어난 것은 인디언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 6･25전쟁이란 떼죽음을 딛고 미국문명을 받아들인 한국 근대화과정의 쓰라린 이율배반, 그것이 미국과 시장자본이 내미는 마약류의 보호구역이 아닐까를 곰곰이 돌이켜보게 하므로 그렇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아니 그럴지 모르겠다는, 그러나 여기에서도 희망은 있다는 듯 이글스의「호텔 캘리포니아」가 귓전을 때린다. 오래된 노래들이 왜 하필 지금 들려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멜로디들은 미국엔 올바른 얘기를 제대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다는 네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 물결은 체로키 부족의 삶을 담은 멜로디를 타고 반짝인다. <본문 중에서>

세계의 석학들이 여기에 수두룩하게 모여 있다는 말이 잠시 반갑다. 삶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폭과 평등의 지표가 한국보다야 넓고 높겠지만 그러함에도 나는 세계의 지성들이 미국에 정착한 이유를 긍정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 등의 석학을 존경하지만 그렇다. 물론 나는 미국인들의 삶이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 윤 씨 아저씨처럼 이민 온 분들의 꿈이 이뤄지기를,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미국이란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허드슨 강은 하늘빛을 받아낸 듯 푸르다. 쌍쌍이 강변에 나온 사람들은 강의 추위도 잊고 이어폰을 나눠 꽂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춘다. 백발의 노신사가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에게 뭔가를 부지런히 알려준다. 모두들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피비린 역사와 관계없이 무수히 생성되는 삶의 이유가 저런 것일 거라고 물결 물결이 쉼 없이 기왓골 무늬로 밀려오며 찰랑거리며 델리의 작은 창을 때린다.

저들이 아름답다. 저들이라고 우여곡절이 없으랴만 내 눈엔 평화롭기까지 하다. 나는 이 풍정을 안고 한국으로, 전주로 돌아갈 것이다.

미국색과 유럽색과 왜색이 갱엿처럼 엉겨 붙은 채 국토가 개발몸살을 앓고 있어도 “국가는 망했어도 봄은 온다.”라는 시구를 붙잡고 있는 땅. 역사의 소용돌이와 관계없이 무수히 생성되는 저 물결처럼 삶의 이유가 출렁이는 곳에서 핵무기와 거대자본과 문명의 이기에 맞서는 인간정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뉴욕을 가로지르는 허드슨강.

나는 아직도 너에게 왜 미국을 선택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너도 그것을 나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리라. 닷새 후 너는 돌아와 새 집에 새로 들여놓은 침대며 가구며 주방기구들에 눈을 못 떼겠지. 네 눈빛은 강 물결을 빨아들이는 햇살처럼 빛나겠지.

그렇게 지내는 어느 날 너는, 내가 잠시 머물렀던 여기에 들러 강기슭으로 번지는 물결을 바라보리라. 델리의 주인이 내미는, 네 혼수로 뭐 한 개 챙겨주지 못한 못난 오빠의 편지를 읽어 가리라.

물질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역사를 바로 이해하면서 이마를 돌처럼 차갑게 하고 살기를 바라는 내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생生의 이율배반이 쓰라릴수록 삶의 정체성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겨울처럼 맑은 날, 다시 한 번 네 혼인을 축하한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