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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너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너는 일주일 후에 돌아올 것이고 그 사이 막내는 여기저기에 나를 또 끌고 다닐 것이다. 나는 막내가 잡은 일정에 조건을 붙였다.

“좋다, 네가 가자는 데로 가주마,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내가 뉴저지를 떠나기 전, 포트리 절벽 쪽 강변에 있던 작은 델리로 나를 다시 데려 가다오. 그리고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까지 아는 체를 말아다오.”

이렇게 부탁했던 것이다.

내가 뉴저지까지 와서 잠타령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타임스퀘어 옆쪽 계단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무는데, 검은 원통형 모자를 쓰고 검은 망토를 두른 유대인 뒤에 내가 아는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저 아저씨가 어떻게 여기 나타나셨나, 미국에 이민 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내가 중학생 때로 기억된다. 아저씨는 전주의 A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이었는데 성이 윤 씨였고 우리 옆 동네에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에 있다는 그 분의 장인어른이 책인가 편진가를 보내왔다고 했다. 1970년대 후반은 북한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우편물이 왔다니 이건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무섭지 않았는지 경찰서에 신고조차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침에 세수하다 말고 모 기관에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학교를 그만두었고 모 대학에 시간강의를 나가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미국에 이민 갔다고 들었다.

타임스퀘어 옆쪽 계단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무는데, 검은 원통형 모자를 쓰고 검은 망토를 두른 유대인 뒤에 내가 아는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 뉴욕의 심장 타임스퀘어.

그런 아저씨를 이런 데서 만나다니. 그러나 아저씨는 내가 인사드릴 짬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세계인들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네 아파트에 돌아와서도 그 분의 삶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의 면면이 이 아저씨와 다를 것임은 자명했다. 한국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 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잘못된 욕망에 갇혀 국가의 중대사가 관철되는, 그런 독재가 싫어서 미국에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었다. 모 기관에 연행되어 얼마나 혹독한 조사를 받았는지 이빨이 죄다 빠져버렸다는 아저씨의 경우는 후자에 속할 것이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희망하는 사회적 그리움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박정희 독재정권이 지긋지긋했을 것이고 그 뒤를 이은 전 씨와 노 씨의 군부정권도 넌덜머리나는 것일 터였다.

윤 씨 아저씨가 겪었던 고통, 아니 우리 민족이 지금도 겪고 있는 비극의 뿌리는 광복 후에 닿아 있다. 일제 식민지를 벗어났음에도 분단을 맞을 수밖에 없었고 6･25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역사. 이 참담한 현실에 미국이 깊이 관여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미국과 소련은 자기네 잇속을 앞세워 1945년 8월 10일에 삼팔선을 그었고 그 주도적인 역할을 미국이 맡았다는 것도 드러난 사실이었다.

광복 후 9월 8일에 들이닥친 미군정美軍政은 한민당 사람들의 말만 듣고 지하에 꽁꽁 숨은 친일파들을 현직에 복귀시켰고, 자발적으로 행정의 공백을 메워나가고 있던 “조선인민위원회”를 빨갱이 조직으로 규정, 이들을 살해했으며 산으로 쫓아냈다.

분단만큼은 막아보자고 동족상잔의 비극만큼은 막아보자고 심혈을 기울였던 여운형 선생은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던 세력에 암살당했다. 1948년 7월 이승만 씨는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40년 동안 일제의 밑씻개 노릇을 하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었던 친일파는 응징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후 중국도 필리핀도 베트남도 미얀마도 북한도 친일파를 처벌해 나갔지만 이승만 씨는 그들에게 역사의 죄를 묻지 않았다. 친일파들을 반공주의자로 둔갑시킨 후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았으므로 단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군정을 등에 업고 1948년 이승만 권력이 선언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분단의 확정이었고, 이것을 반대하는 지식인과 조직적으로 반대 투쟁했던 이들을 이승만 권력은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도륙해버렸다. 어떤 세력인가에 김구 선생도 암살당했다.

글쓴이가 가고자 했던 가장 미국다운 도시로 꼽히는 델리.

대통령직에 눈 먼 이승만 씨의 야욕은 결국 김일성 정권의 오판을 가져왔다. 무력 통일, 스탈린과 모택동을 만나 전쟁 물자를 요청했던 - 수백만 동족이 서로에게 학살당해야 했던 피의 역사를 불러온 것이다. 이 떼죽음 앞에 김일성 정권은 자유로울 수 없다.

역사 현실이 이토록 처참해질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 남한과 북한에 광복절은 있어도 “독립기념일”이 없는 이유가 이승만 씨와 미국 때문이라는 점 또한 결코 피해갈 수 없다.

“한국 전쟁의 기원은 일차적으로 미군정美軍政이 인민위원회를 탄압한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 브루스 커밍스(시카고 대학 교수)의『한국전쟁의 기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왜 그 역사가 다가왔는지. 세계인의 욕망이 들끓는다고 쓸 수밖에 없는 타임스퀘어의 번잡함 속에서 어쩌자고 피비린 근대사가 비틀비틀 다가왔는지. 담배를 빼물었어도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삶의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되지만, 한국역사의 발전을 가로막은 나라가 미국이었는데 하필 그 나라 시민권을 갖는 게 윤 씨 아저씨의 최선이었는지 그것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이병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