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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은 우리 또래들 중 제일 먼저 운동화를 신었고, 맨날 까만 콩장이 되도록 놀아댔어도 시험만 보면 전교 1등이었다. 뒷모정 마루 밑에 떨어진 윷짝 주우러 기어들어갔다가 못에 긁혀 쥐 파먹은 빡빡머리 앞쪽이 때깨칼로 친 쪽밤알같이 하얬다. 그랬어도 여자 친구가 맨먼저 생겼고 고고춤도 제일 잘 추었다.
두목은 1980년 4월 수학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학에 가야 할 고교 졸업장이 문제라면 그까짓 거 6개월이면 된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 돈 낭비할 필요가 없다.”
가족들 반대가 심했지만 학교 때려 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60명 한 반에 12등까지만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는, 그러니까 나머지 48명은 12명을 위해 들러리 수업을 받아야 하는 이딴 게 보편적 합리주의냐고 정면으로 반발한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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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땐 녹음기가 우리에게 최고의 음향기구였는데, 두목은 자신의 둘째 누나가 사준 쉐이코 녹음기를 갖고 있었다. 그 전엔 LP음반을 돌리는 전축이라는 게 있었다. / |
몸과 마음이 일치될 수 없는 열여덟 살 - 그 질풍노도가 갈앉기를 바란 것이었는지, 두목의 자신만만함에 기가 꺾인 것인지 두목 아버님은 마지못해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이 허락은 맘 놓고 놀아도 된다는 허가장이기도 했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두목은 터진 둑처럼 어떤 일에도 걸림새가 없었다. 맘 놓고 늦잠을 잤고 아무 두려움 없이 술 담배를 즐겼으며 시도 때도 없이 둠벙들에 양수기를 들이대고 물고기를 품어먹었다.
전주시 팔복동 3가 406번지. 양철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변솟간을 낀 헛간이 있었고,눈길을 돌리면 울 한가운데 기와 올린 안채가 떠억 앉았는데, 그 오른쪽 우물 너머에 우리의 두목 박민규 방이 있었다. 블록으로 지었을지언정 방은 웬만한 집 안방처럼 넓었고 연탄화덕을 앉힌 부엌이 딸려 있었다.
이렇게 안채와 떨어진 독채, 거기가 우리의 해방구였다. 우리는 짬만 나면 이 방에서 죽쳤다. 밥때가 되면 안방에 들어가 밥통째 밥을 퍼먹었다. 덕규, 재운, 노규, 나, 그리고 이 집의 작은주인인 민규 무려 다섯 놈에게 밥통이 걸려들었으니 밥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 땐 녹음기가 우리에게 최고의 음향기구였는데, 두목은 자신의 둘째 누나가 사준 쉐이코 녹음기를 갖고 있었다.
그 전엔 LP음반을 돌리는 전축이라는 게 있었고, 야외전축이란 것도 있었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턴테이블에 판을 걸고 그 위에 바늘을 올리고 음악을 들었는데 음반을 너무 돌렸는지 정작 듣고 싶은 음악은 판이 먹어 같은 소리만 앵앵대기 일쑤였고, 야외전축은 정작 야외에서 소리가 너무 작아 제 역할을 못했다.
그러나 쉐이코 녹음기는 달랐다. 테이프만 끼면 어디서든 소리가 쾅쾅 울렸다. 음악이 뭔지 그것이 왜 즐거운 것인지 그딴 것엔 관심도 없고 오직 고고박자나 디스코 박자로 신나게 때려주는 음악이 나오면 그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들었다.
가랑비소리처럼 나직나직하게 깔리는 음악도 있었고 클래식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말더듬이 애 터지는 입담 같은 그런 음악은 싫었다. 피 끓는 우리 가슴을 두들기듯 내갈기는 화끈한 음악이 체질에 맞았다.
우리 다섯 놈은 짬만 나면 이 방에서 죽쳤다. 왼종일 책상 앞에 고개 처박아봤자 고구마 반 토막도 안 생기는 공부라는 것은 어디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 비석날 사과밭, 건너물 털보양반네 토끼장, 준호 형네 둠벙, 박 씨네 수박밭, 눈만 돌리면 상관해야 할 일들이 오른손을 번쩍 들고 우리를 꾀었다.
두목은 서리라는 것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새벽 2시에 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는데, 예외가 한 번 있었다. 그 때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일 것이다. 소낙비 내리는 날의 수박서리는 대낮에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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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은 서리라는 것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새벽 2시에 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는데, 예외가 한 번 있었다. 그 때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일 것이다. 소낙비 내리는 날의 수박서리는 대낮에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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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딱 두 번 양마동께에서 소거름 냄새가 짙게 풍겨오자 뒷모정에서 얼쩡거렸다. 소낙비 쏟아지자 지체 없이 발가벗고 불알을 덜렁거리면서 냅다 수박밭으로 뛰었으며, 수박 두 덩이씩 양 팔에 끼고 불알에서 요령소리가 나도록 뒷모정으로 내뺐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슨 서리를 하든 용의주도했고 들킨 적이 없었으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뭐든 먹을 만큼만 따왔고 가져왔지 절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수박밭, 포도밭을 털린 임자들은 틀림없이 우리들 짓일 거라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증거가 없으니 대놓고 닦달할 수가 없었다.
새벽 2시, 홰에 올라가 잠든 닭을 소리 한 점 안 묻히고 목을 비틀어 잡아오는 솜씨, 그것은 유네스코에 기록될 만큼 잽싼 것이었다. 울안에 집짐승들은 사계절을, 과일들이나 채소들은 여름내 가으내 우리들 눈치를 봐야 할 처지였던 것이고, 여기에 해당되는 임자들도 우리의 푸진 씀씀이를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추석 쇤 지 며칠이 지났다. 가을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내는 토요일 오후 우리는 피가 끓는 고2였는데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재미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문 밖에만 나가면 뭐든 우리 눈에 낚일 것이었지만, 늘 하던 것 말고 뭐 색다른 재미거리가 없을까 이러면서 다섯 놈이 점수내기 고스톱을 치고 있는 판이었던 것이다.
두목이 느닷없이 황방산에 가자고 패를 엎었다. 황방산? 우리는 빤히 두목을 바라봤다. 거기 가면 안주거리가 지천일 것이다, 소주 대두병 사들고 황방산으로 소풍 가자, 이러면서 장발머리를 쓸어 올리는 게 아닌가. 안주? 그게 어디에 있는데?
“야, 묘 앞에 가먼 천지가 먹을 거 아녀? 추석날 성묘객들이 놓고 간 음식이 아마 찍찍깔렸을 거다. 먹을 만헌 것으로 추려와서 소주 먹고 고고춤 한번 땡기자 이 말여.”
우리는 지체없이 쉐이코 녹음기를 챙겨들었고 소주 대두병을 사서 황방산으로 향했다. 대두병 2개는 있어야 할 게 아니냐고 노규가 거들었지만 두목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 가면 틀림없이 소주보다 더 좋은 술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셋째 고개를 넘자 산길 좌우로 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우리는 전주제지가 보이는 밤나무그늘에 자리를 폈고 각자 흩어져서 제 몫의 안주거리를 챙겨오기로 했다.
아아, 두목의 예상은 적중했다. 공동묘지만큼 많은 묘들 앞에는 가지가지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기름기 안 빠진 고기적과 아직도 차진 송편과 조청 묻은 부스개며 사탕이며 거기에 달라붙은 개미들이며 술들이 그야말로 찍찍깔려 있었다.
추석 쇤 지 닷새도 넘게 밤마다 이슬 맞은, 꽃뱀이며 까치독사가 혀로 핥고 갔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우리는 양손에 가득 들고 왔다. 밤나무그늘 밑 신문지 위에 음식들이 쏟아졌다. 채 10분을 안 주웠는데도 형형색색의 진수성찬이 우리 눈길을 빨아들였다.
마시자, 가을이니까. 그리고 춤을 추자, 고이 잠든 조상들 앞이니까. 저들의 직계는 커녕 방계도 아니겠지만 하여튼 우리는 저들의 후손이고 이만큼이나 컸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줘야 하니까 미치게 몸을 흔들어서 존재감을 각인시키자.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배고픈 짐승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과일은 한 입만 베어 먹고 숲으로 던지자, 지금 우물거리는 게 설령 소고기전이라고 하더라도 한두 입만 먹는 거다, 거죽이 고동색으로 변했지만 처음 먹어보는 바나나도 마찬가지다. 소주잔을 채우기가 바쁘게 목구멍에 술을 넘겼다.
쥐밤 닷 되를 따왔다는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자리에 끌어들이며 가을의 색감을 눈으로 짚어보듯 술을 들이켰다. 가을햇살에 익은 바람이 밤나무 그늘을 이리저리 끌어당기며 소란을 떨고 팝송을 입에 문 녹음기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몸뚱이들이 눈알 빛내며 일어섰다. 아랫도리를 흔들어야 하는지 어깻짓을 어떻게 해야 춤이 되는지 스텝이란 것도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도 모르고 무작정 바깥세상으로 튕겨나갈 것처럼 사지육신을 흔들어댔다.
서리란 서리는 다해봤어도 몸서리는 못해봤다, 몸서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 그것에 한 맺힌 놈들처럼 집중적으로 허리 아래 토막을 흔들어대며 암컷을 찾는 온갖 시늉을 다했다. 땀에 젖은 몸이 술을 찾는다,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리듬과 미치게 흔들어대는 몸짓들 사이로 친구들과 형형색색의 안주거리가 맞물려 막 돌아가고 있었다.
컴백인지 베드 케이스 러빙윤지 귀에 익은 후렴 토막을 뱉어내면서, 섹시뮤직을 한사코 섹스뮤직이라고 악쓰면서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누구 우리더러 공부를 못한다고 하냐, 우리보다 공부를 잘하는 새끼들이 더 많을 뿐이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다섯 놈이 순 막춤으로 무덤들의 뙈를 다시 입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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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초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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