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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17미터쯤 되는 황방산黃尨山. 전주시 팔복동과 효자동, 완주군 일부를 몸에 끌어들인 낮은 산이로되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측되는 고인돌 몇 기가 있다. 서고사와 일원사 등의 사찰을 품었으며 산이 황방폐월형黃尨吠月型이라서 어딘가에 명당이 있다고들 했다. 바람 쐰다는 핑계를 대고 형철 대부가 명당으로 찍었다는 묏자리를 찾으려고 일원사 밑을 얼쩡거릴 때였다. 성기 아제가 바루산께에 산다는 말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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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서북쪽을 막고 있는 황방산. |
아제는 하트 문양에 화살이 꽂힌 손등 문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고 왜 왔냐는 듯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당신의 탯자리 유제리가 콘크리트에 묻혀버린 뒤에도 바루산 자락에 그냥쟝 집을 짓고 혼자 살았다는 아제. 황방산은 물론 옥계동이며 틀못, 산 너머 효자동 공원묘지며 그 옆의 승화원이란 화장터에 얽힌 사연까지 샅샅이 훑고 산다는 아제였다. 더구나 그는 산일에 도가 튼 위인이라고 호가 난 사람이었다. 모악산을 모산母山으로 삼고 묏자리를 잡을 때 땅속에 든 물길과 불길까지 정확히 짚어낸다고도 들었다. 이런 아제이니 그를 만나기만 하면 명당明堂에 관한 내 궁금증은 단박에 풀릴 것이었다. 잘 쓴 묘를 파보면 뼈도 없고 물만 찰랑찰랑하다고 하던가. 명당자리는 자자손손 복을 내린다던가. 흥선군 이하응이가 아비의 묘를 잘 써서 그의 아들이 고종이 되었다던가.
“너, 시방 그것을 말이라고 허냐? 명색이 선생이담서 생각이 그것밲에 안 된단 말여? 그려, 명당이 있다고 치자, 그러먼 뭐가 어칫게 되는디?”
아제는 한심하다는 듯 눈길이 허망해지고 있었다. 장리빚까지 내서 대학 가르쳐 놓으니까 엉뚱한 데다 세월 버리고 있다는 투가 역력했다.
“황방산에 명당이 꼭 한 자리가 있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한 어른이 성리학을 허신 니 증조부님인 것도 잘 안다. 하고 많은 산자락 중에 삽살개 주둥이 겉은 산 그림자 하나가 달을 꽉 깨물 디끼 허는 거그가 명당이라고들 허드라. 근디 그것이 왜 긍금허냐? 그런 자리가 있으먼 뭐허고 없으먼 뭐허냐 이 말이다. 내가 묘를 파고 허물고 되파는 데 이골난 사람이다. 사람 뼉다구를 나같이 많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말여. 조선 팔도 어디든 명당 없다고 허는 디가 없다는디 그런디도 사람덜 사는 게 그 모냥덜이냐? 나라는 여태 땅 갈라져가꼬 이 모냥이고? 오래된 묘는 흙이다, 흙. 뼉다구 늘짝 그런 것도 없고 그냥 흙이더랑게. 근디 그런 것이 뭔 심이 있어서 후손들헌티 복을 주것냐. 복을 주먼 살아 있는 사람이 주는 것이지 죽은 뼉다구가 뭔 지랄헐 심이 있다고 복을 주것냐 이 말여. 너는 선생이담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이란 말도 모른단 말여?”
아제는 발끈했다. 너 같은 것 하고는 말도 안 섞겠다는 듯이 돌아앉아버렸다. 나는 놀랐다. 삽 한자로 평생을 살아온 아제가 명당 운운하는 내게 혹세무민이란 성어를 깔고 조국의 분단까지 들먹일 줄은 정말 몰랐다. 더구나 땅에 묻힌 뼉다구가 무슨 힘이 있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겠냐는 말에 나는 꽁지 빠진 새가 되어버렸다. 아제는 담배를 빼물고는 불 댕길 생각도 안 하고 문창에 비친 저녁햇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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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방산에서 서쪽으로 내려다 보니는 오늘날 전주 혁신도시. |
“오래간만에 만났응게 반찬은 없어도 저녁이나 먹고가라잉. 사람 애터지게 허지 말고.”
아제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문짝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내 나이는 중학교 1학년으로 토막나버렸다. 벽에 박힌 못들과 그 사이에 띄엄띄엄 걸린 옷들이 나를 불쌍하게 내려다봤다. 명당과 관계된 얘기를 꺼내려고 왔으면 이것과 관계된 공부를 미리 했어야 옳았다. 자손을 번성시킨다는 ‘금계포란형’, 자손대대로 복록이 쌓인다는 ‘와우형’, 자손의 발복이 매우 크다는 ‘매화향기형’,자손 중에 군자가 난다는 ‘도화낙지형’ 등의 한자성어 몇 개쯤은 알고 있어야 했다.
담배를 한 모금 내뿜으니 아제 말발에 기죽어 있던 숨통이 조금 트였다. 창피 떨 곳이 없어서 고향 산자락에 와서 창피를 떠나 이런 생각이 잠깐 스쳤다. 그렇지만 옛사람들이 지목한 곳이 왜 묏자리이며 왜 묏자리가 아닌지를 명쾌하게 알고는 싶었다. 그림자만 부부여서 제삿날만 되면 시끄러워지는 집이 한둘이 아니고 조상의 무덤을 명당에 썼든 안 썼든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 후손이 허다하다는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랴 싶지만, 묏자리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묏바람 잘못 불면 집안이 절구난다는 속신俗信에 기댄 내 유치한 호기심을 맘껏 충동질하고 싶기도 했다.
“맛이 없더라도 한 술 떠라. 비계토막 남은 게 있어서 신김치 넣고 끓였다.”
아제는 예전의 아제가 되어 살갑게 다가왔다. 아제는 내 아버지의 막역한 후배였다. 방죽미티 꺼먹둥이집에서 막걸리를 먹다가도 내가 지나가면 알사탕이라도 입에 물려서 집에 보내던 그였다. 쌀가마 보리가마를 어깨 너머로 휙휙 집어던지던 세월 뒤로 보내고 삽 한 자루에 일흔이 된 육신을 맡기고 산다는 아제. 앉은뱅이책상에 컴퓨터 모니터가 놓여 있는 게 신기했지만 가끔씩 오갈 그의 손자들 것 아니겠냐고 짐작했다. 아주머니를 마흔에 보내고 혼자서 다섯 자식을 키웠다는 아제. 맥주 글라스에 담긴 소주를 쭈욱 들이켜고 나더니
“너 보도연맹이라고 들어봤냐?”
이러지 않는가. 순간 내 마음이 서늘해졌다. 사람들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이다, 목숨 줄 놓은 아버지 산에 모시려고 땅을 파보니 물이 질척거리는 데, 그런 곳에 아버지 모실 넋 빠진 놈이 어디 있겠냐. 남들 보기에도 풍광이 좋고 땅이 고실고실한 데에 모시고 싶지 않겠냐. 그런 따뜻한 마음을 혹하게 해설랑 명당입네 하면서 장사해먹는 것들에게 속으면 안 된다잉. 이런 말이 뒤따를 줄 알았는데 보도연맹이라니? 그 무지막지한 학살사건을 아제가 알고 있단 말이냐? 소주를 들이켜다 말고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니 아제는 시늉도 않고 글라스에 소주를 채우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내렸다는 지시, 경찰과 군인과 서북청년단이 남한의 민간인 30여만 명 이상을 학살한 사건 아니던가. 보도연맹의 정확한 이름은 ‘국민보도연맹’이다.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로 이들은 가끔 대한민국지지, 김일성 타도, 공산당 반대 따위의 관제 데모를 일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6‧25전쟁 초기에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보도연맹에 위장 가입한 좌익세력들이 전쟁을 틈타서 반정부 활동을 벌일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했던 이승만 세력과 반공극우단체 등은 결국 이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여 우물, 갱도, 산골짜기에 버리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여그도 그런 일이 있었다. 처음엔 나도 몰랐는디 곰곰이 생각혀 봉게 그것일 거란 생각이 들더라. 시방 효자동 공동묘지 옆에 승화원이란 화장터 있지야? 그 근처에 옥계동으로 빠지는 산길이 있었는디 거그 산길 꼬라당 위 아래로 칡이 참 많었다. 어려서 뭐 먹을 것이 있었것냐. 겨울에 칡부리 캐다가 해골 바가지덜을 캐곤 혔지야. 그 해골덜이 이 사건허고 상관이 있었던 것 아니것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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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황방산 공원. |
아제는 2003년 4월 20일자 <새전북신문> 기사를 내밀었다. 기사는 전쟁 당시 전주 지역에서4,500 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는데,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1,400명의 사상범도 학살되었다는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이 보도 후 경상대학교 국문과 신경득 교수가 당시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민주조선(1950. 8. 21)’이란 신문을 보내왔는데, 새전북신문은 민주조선의 보도내용을 토대로 “학살에 참여한 사람이 경찰, 헌병대, 방첩대원이었다. 3년 이상의 형을 받은 수감자의 처형에는 미군 입회하에 총살하였고, 2년 이하의 단기형을 받은 인사들과 미결수들, 과거 군중대회에 단 한 번만이라도 참가한 일이 있던 사람과 소위 보도연맹 가입자들까지도 한 사람 빼놓지 않고 모두 학살했다. 또 학살된 사람들은 솔개재 부근과 황방산 골짝, 전주형무소 뒤 공동묘지에 묻혔다.”라고 밝히고 있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보도연맹이란 말은 들어봤지만 그 비극이 황방산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오르내렸던 산, 깽매기 치며 몰던 토끼를 가랑이 사이로 놓치고 아쉬워했던 산, 모악산보다 낮다고 기죽지 않은 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주병을 들고 찾아와서 목 놓았던 산, 사람이 죽어서 오면 그를 새 식구로 맞아들이고 어깨를 쭈욱쭉 펴던 산, 이렇게 정다운 산이 피비린 과거를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이 사실이 이제야 내 눈앞에 드러났단 말인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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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초 시인. |
► 이병초 약력
전주에서 태어나 우석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8년 문예 계간지《시안(詩眼)》에 연작시「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밤비』(2003년, 모아드림),『살구꽃 피고』(2009년,작가),『까치독사』(2016년, 창비) 등이 있고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