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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초 봄눈 내리는 날 나는 다짜고짜 이별을 고했다. 왜 헤어져야 하냐고, 이유를 밝혀달라는 듯 옥이는 말똥말똥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눈 내리는 음악실 앞 허리 휘어진 소나무 밑에서 옥이는 신발 앞부리를 땅에 쳐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조만간 학교를 그만둘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차비에 여윳돈까지 마련하고서도 나는 학교를 그만두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책보따리를 싸들고 집에 갔다가 나는 아버지께 뼈도 못 추리고 맞아 죽을 뻔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는 아무리 울화통이 터져도 살림살이를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달랐다. 손에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살림살이를 박살냈다.

3월초 봄눈 내리는 날 나는 다짜고짜 이별을 고했다. 왜 헤어져야 하냐고 이유를 밝혀달라는 듯 옥이는 말똥말똥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조만간 학교를 그만둘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버렸다.(본문중에서) / 사진은 폼 나는 학창시절을  꿈꾸는 영화 '바람'의 한장면.

  “단칸방으로 쫓겨났다고 너까지 애비를 무시하냐, 오냐 그러면 내가 죽어주마.”

  아버지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방안이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핏발 선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불이 눈물과 섞였는지 아버지의 눈길은 번들거렸다. 거친 숨소리가 벽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께 내 뜻을 말씀드리기는 커녕 말 한 마디도 못 꺼내보고 싸들고 왔던 책보따리를 메고 나는 다시 화호로 돌아왔다. 옥이에게 학교를 그만둘 거니까 헤어지자고 선언해놓고 다시 돌아온 화호, 친구들과 훗날 성공해서 만나자고 소줏잔 부딪쳐 놓고 다시 돌아온 화호, 나는 나에게조차 실없는 놈이 되고 말았다.

  친구들아 나를 무시해다오, 벌레처럼 취급해다오. 나는 혼자가 되었다. 친구들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말을 붙여왔지만 되도록 말을 아꼈다.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같은 학년이래야 두 반밖에 안 되는 울타리 속에서 나는 줄곧 옥이를 외면했고 옥이도 무슨 앙심 같은 걸 먹었는지 긴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더라도 서로 딴 데를 바라보았다. 

  학교가 끝나면 기타를 메고 동진강 둑길로 내빼서 목구멍이 붓도록 노래 부르는 게 일이었다. 운이 좋은 날은 급우들과 동진강 옆의 좁은 수로를 품어서 잡은 물고기로 소주 병나발을 불었는데 자취방에 돌아오면 나는 다시 혼자였다.

  비가 내리면 그 빗속을 걸었고 가시내랑 걸었던 둑길에 앉아서 빗물을 안주 삼아서 소주를 마셨다. 고잔이란 동네를 가다보면 오른쪽에 수문이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가서 우두커니 달맞이하는 때가 잦았다. 둘이 걸었던 들길을 혼자 걸으며 바람을 만났고 물떼새소리를 만났고 달빛을 만났다.바람이 앞섶을 파고드는 사이사이에 물떼새소리가 끼어들었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달빛이 갯버들잎 사이로 새어나오기도 했다. 

  옥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옥이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밤물결소리가 달빛에 부서지곤 했다. 그러다보면 옥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기 가시내가 밤길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어디 숨었냐, 다 안다아! 이러면서 종종걸음으로 애타게 나를 찾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나는 바람 속에서 잠이 들었다. 밤물결소리를 걷어차며 잠을 깼다. 이를 닥닥 떨며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냉골에 몸을 부렸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 내 마음 속에서 숨통 틔운 불씨를 철저하게 혼자 간직하는 것, 내 욕심을 철저하게 내려놓으며 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 이것이 옥이에 대한 예의일 것이었다. / 사진은 폼 나는 학창시절을  꿈꾸는 영화 '바람'의 한장면.

  보고 싶었다. 미치게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시내에게 달려갈 수가 없었다. 나에게 정성을 다했던 옥이의 진정을 거절한 내 행위를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내 마음 속에 똬리 튼 옥이 자리를 캐내고 싶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거문고 소리를 낸다는 명금산鳴琴山, 그 산자락을 끼고 오갔을 옥이의 등하교 길과 붓으로 눈썹이며 코며 입술 언저리를 곱게 그린 것 같은 얼굴이며 해맑은 웃음소리가 가슴에 아팠다.  

  그 다음 해 겨울, 송이송이 눈 내리던 밤에 나는 명금산 근처 어느 헛간에 들어 가맛때기 두르고 언 몸을 녹였다. 가시내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 못 먹인 자리를 까뭉개려는 듯 벽에 걸린 쇠스랑과 괭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배꼽 아래에 힘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나를 따라오며 가물거리던 먼 불빛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 숨소리가 고요해지고 있었다. 어둠을 찍어 꾹꾹 눌러서 쓴 ‘한 송이 백합’이라는 글씨와 머리를 빡빡 민 내 허물과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리던 수줍음 싹둑 잘라버리고 단발머리로 나타난 옥이와의 기억을 송이송이 합장合葬했다. 

  불기 한 점 없는 밤이 깊어갈수록 쥐오줌 냄새 퀴퀴한 헛간 속에서 숨통을 틔우던 불씨 - 가맛때기 둘렀어도 덜덜 떠는 목숨이 타다 만 장작개비라도 되는지 내 눈을 찌르듯 엉기는 불씨를, 수수깡벽에 새는 눈송이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너 이담에 뭐가 될 거야?”

  다짜고짜 내 날갯죽지를 꺼내려들 옥이가 헛간 어딘가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꽁꽁 언 내 볼을 두 손으로 어루만져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 내 마음 속에서 숨통 틔운 불씨를 철저하게 혼자 간직하는 것, 내 욕심을 철저하게 내려놓으며 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 - 이것이 옥이에 대한 예의일 것이었다. <다음회에 계속>

► 이병초 약력

전주에서 태어나 우석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8년 문예 계간지《시안(詩眼)》에 연작시「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밤비』(2003년, 모아드림),『살구꽃 피고』(2009년,작가),『까치독사』(2016년, 창비) 등이 있고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