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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앞에 있는 논 서너 다랭이를 지나면 미나리꽝이었다. 진영이네 논이었는데 앞시암이 원래 그 자리였다는 곳에 작은 섬처럼 어미미나리가 자라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물이 잘박거리는 논에 진영이네 식구들은 씨미나리를 심었다. 처음엔 검불 토막처럼 시원찮아 보였던 씨미나리가 한 달쯤 지나면 봄날 쑥처럼 파릇파릇 고개를 내놓고 미나리꽝에 꽉 쩔어버렸다. 미나리의 키가 얼만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목만 내놓고 이리저리 물결을 타는 쑥부쟁이 같은 것들이 신기해 보일 뿐이었다. 

  이런 내 궁금증을 알고 있다는 듯 한겨울이면 아저씨들은 가슴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어깨까지 오는 고무장갑을 끼었다. 고무 튜브를 밀고 미나리꽝에 들어가서 얼음을 깨고 미나리를 뽑았다. 미나리꽝 옆 논에 지어놓은 비닐하우스엔 아저씨 아줌마들이 그득했다. 그 바깥에는 반 잘린 드럼통에 장작불이 타올랐다. 그네들은 비닐하우스 속에서 내 허리만큼이나 자란, 막 뽑아온 미나리를 손질해서 다발로 묶었다.

  미나리가 몸 어디에 좋은지는 잘 모르지만 간에 좋다는 말은 들은 것 같다. 피를 맑게 한다는 말도 들은 것 같다. 그러나 내 마음을 지금도 아프게 하는 것은 미나리꽝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은 어금니가 없다는 말이었다. 

  가슴까지 오는 장화를 신었고 고무장갑을 끼었지만 얼음 깬 물속에 들어가 미나리를 뽑는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닐 것이었다. 영하 12, 3도가 보통이었던 당시 물 위에 들러붙는 추위는 더 혹독했을 것이었다. 추위를 견디느라고 얼마나 어금니를 꽉 깨물었으면 아저씨들의 어금니가 모두 거덜났다는 말이 생겼을까. 아저씨들 입을 열고 어금니를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초겨울이었다. 다른 논들은 벼가 베어져 텅 비어 있는데 유독 이 미나리꽝 즉 진영이네 논만은 물이 찰랑거렸고 파릇파릇했다. 학교 운동장 버금갈 만큼 넓은 미나리꽝. 그러나 거기에 특별한 놀잇감은 없었다. 겨우 목만 내놓은 미나리들이 초승달 같은 물결 수천수만 개를 받아먹으며 찰랑거리는 그 차가운 곳에서 뭔 짓을 꾸리려고 했던 것도 물론 아니었다. 

  삽을 들고, 쭈그러진 반 되 주전자 허리에 차고 벼포기 밑동을 파헤쳐 미꾸라지를 캐먹을 수는 있었지만 미나리꽝은 뭔가가 생기는 곳이기는 커녕 미리 한기를 느낄 만큼 추운 곳일 뿐이었다. 학교를 오가며 찾는 껀수가 적어도 미나리꽝에서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한때 다라이배를 띄우고 미나리꽝을 즐겼을 젊은날의 청년들은 이제 삶터로서의 미나리꽝을 마주하고 있다. / photo by 배배

  어머니는 생강 캐러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들 옆에 새 고무다라이가 눈에 띄었다. 물로 씻은 배추를 소금 간 할 요량으로 사온 모양이었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그냥 한번 발로 툭 건드려 보았는데 어쩐 일로 물이 찰랑거리는 미나리꽝이 눈앞에 떠올랐다.

  동생 병작이를 데리고 미나리꽝으로 향했다. 다라이를 물에 띄우고 조각배처럼 탈 요량이었다. 동생에게 꽉 잡고 있으라고 이른 다음 나는 다라이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다라이배를 타려면 중심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밀어! 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엔 절대로 다라이를 놔서는 안 된다. 배가 단박에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는 사람 애간장을 태우며 눈심지를 세우며 밥알에 섞인 뉘 골라내듯 신중하게 뱃길의 역사를 트는 것이다.  

  “밀어!”

  내 말이 떨어지자 병작이는 다라이를 앞으로 밀었다. 다라이배는 천천히 앞을 향해 미끄러졌다.출항에 성공한 것이다. 내 몸이 돛대인 양 다라이배는 바람을 타고 미나리꽝을 일직선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갔다가 오는 또래들이며 형들 누나들, 방죽미티 방앗간에 오가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큰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금세 미나리꽝이 내려다 보이는 건너물 큰길에 모여들었다.

 아아,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무다라이 속에서 나는 자랑스럽게 사람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다라이 속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에게 열렬하게 반응해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배가 단박에 뒤집힐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앉아서 눈에 보이는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미나리꽝 끝까지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라이배가 미나리꽝 끝에 이르러 부목도 안 대고 무사히 상륙하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부르며 박수를 쳤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다라이배를 타고 미나리꽝을 항해하는 것도 신기한데 사람들의 환영까지 받으니 내 또래들도 나처럼 다라이배를 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배를 한 번 더 타려고 애초에 배를 띄웠던 항구로 가면서 보니 이미 또래들은 제 집의 다라이들을 가져와서 출항出港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리이배의 출항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는다면 배는 단박에 미나리꽝에 처박힐 테니까. 이런 내 염려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서둘러서 닻을 올렸다. 배 타는 꼬소로운 맛을 어서 느끼고 싶었는지, 건너물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흩어지기 전에 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는지, 지금 이대로 5대양을 항해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다라이배들은 앞으로 나가기는 커녕 중심도 잡기 전에 그대로 미나리꽝에 처박혔다. 그들은 그야말로 뻘 같은 것을 몽땅 뒤집어쓴 거무튀튀한 가물치가 되어 에퉤퉤! 논둑으로 다라이를 끌고 갈 뿐이었다.

  나는 일등 선장답게 동생에게 처음 말한 내용을 이른 뒤 두 번째 항해를 시작했다. 다라이배는 순조롭게 바람을 타고 앞으로 미끄러졌다. 큰길가에 모인 사람들이 다시 나를 향해 환호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미나리꽝에 다라이배라니!

  우리 동네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용기가 생겨 반쯤 몸을 세워서 이들의 환호에 답하듯 손을 흔들어줬다. 이렇게 나는 환호를 받으며 태평양을 건너리라, 인도양을 건너리라, 양놈들 조상은 똥개라는데 그것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돌아오리라. 미국에 가서 옥수수빵 만드는 기계를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오리라. 

  뒤를 바라보니 시궁창 속 같은 미나리꽝에 처박혔던 또래들이 다시 출항의 닻을 올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척도 내 뒤를 따르는 배는 없었다.세 번째 출항은 동생에게 맡겼다. 병작이는 내 말을 제대로 따랐고, 건너물에 모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서 그들의 환호에 답했다.

  여기까지가 추호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은 엉뚱하게 돌아왔다. 내가 애들을 꼬드긴 통에 소금 간해서 배추 담아낼 고무다라이를 다 버려놨다는 것이었다. 사람과 다라이가 시궁창 같은 미나라꽝에 처박혔으므로 이것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터... 말을 둘러대다 못해 모든 이유를 내게 죄다 뒤집어씌우고 짜식들은 후다닥! 아랫방으로 튀어버린 게 분명했다.

  이런 짐작은 또래들의 미나리꽝 항해 실패가 내 탓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나는 단지 동생과 미나리꽝에서 다라이배를 타고 싶었을 뿐이고, 1등 선장답게 항해에 성공한 것밖에는 없다. 또래들이 나처럼 다라이배를 타고 싶든 말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사정이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다라이배 말썽의 몸통으로 지목하고 함부로 잡들이해댔던 것이다. /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

► 이병초 약력

전주에서 태어나 우석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8년 문예 계간지《시안(詩眼)》에 연작시「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밤비』(2003년, 모아드림),『살구꽃 피고』(2009년,작가),『까치독사』(2016년, 창비) 등이 있고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