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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미자랑 보리밭에서 나온 적이 없다. 여학생 변소에 꽃뱀을 풀어놓은 적도 없다. 하늘을 빠개버릴 듯 짜악짝 번개가 치고 비바람 몰아치던 밤에 우리 교실 유리창을 모조리 박살낸 까까머리는 내가 아니다.

  저녁 어스름에 영미 누나가 물동이를 이고 찰랑찰랑 구판장 골목에 들어섰을 때 다짜고짜 누나 젖가슴을 만지고 입술에 뽀뽀해대고 뺑소니친 놈은 결단코 내가 아니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었으니 어떤 행동을 해도 꼼짝 못할 것이라고 계산할 만큼 나는 영악하지 못하다. 선희가 뚱뚱하다고 입소리를 낸 것도 근수였지 내가 아니다. 그녀 오빠에게 얻어터지면서도 변명조차 못한 것은 차마 친구 이름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병초 시인.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짓들을 내가 한 짓이라고 우기고 한사코 나를 악동으로 모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하다. 방죽미티 점방에 쌀 퍼서 캐낸 돈을 짤짤이로 다 잃기 직전에 선배들과 멱살잡이는 했을지언정 영록이 매형네 수박 몇 덩이를 따먹을지언정 명분 없이 주먹을 휘두르거나 수박밭 모든 수박에 말뚝 박는 모진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거울을 보자, 어디를 봐서 내가 악동이란 말이야. 생김생김이 둥글넓적하니 자연스럽지 않느냔 말이다. 더구나 내 악동 짓이란 게 친구들이 꺼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나와 관계된 입썰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기억의 공소시효를 진작 넘긴 헛소문이 대부분일 터였다. 

  그러나 짜식들은 까까머리 시절을 신통방통하게 쏙쏙 끄집어내서 물개똥 재린 팬티를 농틈에 처박아버린 놈은 무조건 나라고 못을 박았다. 딴 놈이 한 짓이라고 목을 세우면 세울수록 내 자리만 옹색해졌다.

  억울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내가 악동이었다고 호가 난 이유가 무엇일까. 무슨 짓인가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러지 않겠냐는 의구심이 들어 가끔 뒤가 켕기긴 켕긴다.  <다음회에 계속>

► 이병초 약력

전주에서 태어나 우석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8년 문예 계간지《시안(詩眼)》에 연작시「황방산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밤비』(2003년, 모아드림),『살구꽃 피고』(2009년,작가),『까치독사』(2016년, 창비) 등이 있고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웅지세무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