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비가 내리면서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다. 아침저녁으로는 을씨년스럽고 썰렁하기까지 하다. 며칠만 지나면 가을도 끝자락인 11월이다.

늦가을하면 가수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이 언뜻 떠오른다."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노랫소리만 들어도 늦가을의 서글픔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다.

박장우 전북포스트 주필

소설가 이외수도 11월의 애잔함을 시로 표현했다.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을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도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북미 대륙 인디언 종족들의 대표적인 계절적 표현을 보면 시인 못지않다.

1월: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2월: 홀로 걷는 달, 3월: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4월: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5월: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 6월: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 7월: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 8월: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 9월: 검정나비의 달, 10월: 큰 바람의 달, 11월: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2월: 무소유의 달

인디언의 11월은 종족 숫자만큼이나 부르는 명칭도 많다.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테와 푸에블로족),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크리크족),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체로키족), 강물이 어는 달(하다차족), 기러기 날아가는 달(키오와족), 물물교환의 달(동부체로키족), 작은 곰의 달(위네바고족), 아침에 눈 쌓인 산을 바라보는 달(위시람족), 많이 가난해 지는 달(모호크족), 이름 없는 달(주니족),..11월이니 November니 하는 것보다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우리나라의 한 환경운동단체에서도 특이한 달력을 제시했었다.

1월:해오름달(새해아침에 힘있게 오르는 달), 2월:시샘달(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달), 3월:물오름달(뫼와 들에 물오르는 달), 4월:잎새달(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을 돋우는 달), 5월:푸른달(마음이 무른 모든 이의 달), 6월:누리달(온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차 넘치는 달), 7월:견우직녀달(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달), 8월:타오름달(하늘에서 해가 땅위에선 가슴이 타는 열정의 달), 9월:열매달(가지마다 열매 맺는 달), 10월:하늘연달(밖달뫼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11월:미틈달(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12월:매듭달(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 달)

환경운동단체가 제시한 11월 ‘미틈달’의 ‘미틈’은 가을에서 겨울로 밀어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인디언만큼 애절한 자연감각은 없는 것 같다.

11월은 모든 사람들을 조금은 숙연하게 만드는 달이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지나와 버린 때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내려놓기’를 설파하고 다른 지혜자는 ‘새로운 시작’을 충고한다.

11월에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연초 해보려고 다짐했지만 아직도 해보지 못한 그 길에 대한 아쉬움과 동경 말이다.

노년에 가장 많이 반성하는 것 중 하나는 젊었을 적 해보려고 마음만 먹었지 실제 해보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미련이라 한다.

11월이 되면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작은 아쉬움에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럴 땐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가 제격이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11월은 인생으로 치면 육칠십 고개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남들 눈치 보며 살 때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오늘만큼 중요한 날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11월은 인디언 아라파호족의 말처럼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 될 테고 말이다. / 박장우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