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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 마을에서 천하를 보다 - 자본의 ‘멋진 신세계’와 ‘강탈당한 자치공동체’<신년기획>전라도 정도(定都) 천년...'동방의 등불'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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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31  17: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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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새만금 대안 개발을 찾는 ‘새만금도민회의’가 발족하였다. 정부가 투자한 ‘새만금개발공사’도 곧 출범한다.

‘새만금간척사업’에 대한 찬반을 떠나 이 사업은 지역적 삶의 양식과 지역의 구성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서로 다른 생각인 두 조직의 출범을 계기로 환경성 관점보다는 자치관리 또는 자치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새만금간척사업의 의미를 따지고 대안개발을 찾아본다. 

 

   
새만금 대안 개발을 찾는 새만금도민회의가 8월 28일 발족했다. / 뉴스1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국가 개발 사업의 정치적 본질은 자치적 삶의 파괴와 국가 지배 영역의 확장이다. 바다는 법률적으로는 국가의 소유라도 누대로 연안의 원주민들에 의해 공유자원으로 자치관리되어 왔다.

갯벌이 살아있는 남해의 신안 등지에서는 마을 공동체 노동이 갯벌을 자치관리하고 있다. 정부는 호시탐탐 갯벌에 자본 투자를 허용하는 법안을 제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갯벌 노동공동체를 추방하고 자본에 의한 수산업을 들여오는 것이 성장인가? 그러면 몇십조 원의 공적자금을 부도난 자본에게는 주면서, 어민공동체에는 왜 못 주는가? 갯벌을 어민에게서 빼앗아야 속이 시원한가?  

‘새만금간척사업’은 공유자원으로 관리해온 바다에서 원주민을 내쫓고 성장이라는 이름의 산업화를 통해 자본의 소유로 바다를 헌납하는 계획이다. 비록 그 사업이 성장을 가져오더라도 원주민의 토지와 바다에 대한 자치관리의 영역은 줄고, 이는 곧 국가에 의한 자치민주주의의 침해를 가져온다. 성장이 민주주의를 침해해도 괜찮은지 심각한 질문에 부딪힌다.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바다에서 너와 나의 차별 없이 협동하며, 상호부조하는 자치민의 삶은 국가 지배 영역과는 다른 삶이다. 뭍에서는 다양한 농사보다는 단작인 벼농사가 도량형이나 세금을 매기는 일에서 자치의 영역을 국가의 지배 영역으로 끌어들이기가 쉬웠던 것처럼, 국가의 간척 사업은 바다와 갯벌에 대한 국가 지배 영역의 확장이다.

간척사업은 애국적으로 내 나라 국토가 넓어지는 것에만 의미를 둘 수 없다. 간척사업은 그 사업의 집행에서부터 완공 후에 벌어지는 각종 세금, 간척지에 투자되는 각종 개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그들의 대리인인 관료조직을 발전시킨다.

이는 육지에서 댐을 만들어 그 수자원을 사용하는 모든 지역의 자치민들을 국가의 식민으로 만드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공유자원인 물을 거대한 댐으로 가두어 도시와 농촌의 모든 지역을 일거에 통제의 범위로 만드는 일은 오래전에 중국에서 운하를 만들어 백성을 왕조의 식민으로 만들어가는 중앙집권적 국가의 강화와 동일한 방법이다.

 

   
새만금 상공에서 바라본 동서2축 도로 건설현장이 바다 위로 길게 뻗어 있다. 자본의 만리장성 새만금에서 원주민은 추방된 오랑캐가 되었다. 

비록 댐들이 홍수 예방과 물의 상시적 이용으로 농경과 도시 생활에서 자치민들의 삶을 개선시켰더라도 국가에 의한 대형토목사업은 국가가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국가 지배영역의 확장이라는 정치적 본질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자치경제의 축소이고 자본지배의 확장이다. 성장한다면야 누가 지배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중대한 문제이다. 

국립지리원이 발행하는 지도는 대한민국의 국토 영역을 표시하지만 그 지도의 영역에는 국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비국가적 영역이 있다. 농업경제 시대에는 화전민의 삶과 국가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다양한 밭농사를 하는 소농과 산간의 임산물 채취업과 수공업 제조의 대부분이 비국가적 지배영역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를 관철하고 각종 측량기구와 통신의 발달, 국가를 대신하는 각종 행정기구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사업자등록이 없는 소농과 어민들은 자급자치적인 삶을 통해 비국가적 영역의 삶을 어느 정도 누리고 있다.

비록 그들의 마을에 정부의 지원금으로 창고가 지어지고, 도로가 포장되고, 상하수도가 들어와도 자치적 농어민의 삶은 온전히 모든 것을 국가와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는 도시의 노동자와는 다르다.

도시의 노동자는 단결에 의해 노동조합이라는 공동체의 생활을 가질 때에 비로소 부분적으로나마 국가와 자본을 벗어난 자치적 삶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지금 두레와 향약을 대신해서 무미건조한 계약의 세계가 공동체 마을을 깨트리고 있다.

개발사업의 정치적 본질은 이와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치적 삶을 파괴하고, 국가의 지배영역을 확장하고, 관료기구를 확장하며, 자본에게 이윤 추구를 위한 새로운 신천지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행위는 언제나 ‘발전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새만금간척사업은 자본의 ‘멋진 신세계’이지만 자치민에게는 ‘강탈당한 자치공동체’이다 

원래가 함께 있을 뿐인 우리가 소유하지도 않은 바다이거늘 그 누가 자본에게 팔 수 없는 바다를 팔려고 하는가? 새만금은 정부와 정당들의 정치적 흥정, 멈추면 죽는 기계인 토건 세력, 성장불패의 신화에 빠진 관료, 언론들과 토호들이 나서서 만든 거대한 자본의 만리장성이다.

   
누대로 이어진 갯벌에서의 자치관리 노동. / 사진=전라도닷컴

부안 수성당 할미의 우주창조 신화가 숨 쉬는 부안 앞바다, 김제만경 너른 들을 감싸 안은 뭇 생명들의 고향인 김제 앞바다, 철이 되면 조기떼 울음으로 잠 못 들던 바다, 빛나는 별들의 섬인 고군산군도 앞바다와 금강에 이르기까지 세워진 새만금방조제는 국가주의, 자본주의, 기업주의, 기업자치, 관료주의를 보여주는 생생한 타임캡슐이다. 

그들이 파괴한 건 생명의 자연만이 아니다. 그들은 바다에 뿌리한 지역공동체를 추방했다. 주민자치 대신 기업을 위한 자치를 만들었다. 

노동공동체에 기반한 바다에서 서로 아낄 것도 없이 나누며 사는 농어민들의 삶은 무시되었다. 필요한 만큼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며, 너의 바다, 나의 바다 구분 없이 부족하지만, 자식들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었던, 자기 노동의 주인인 어민의 삶 대신 공장의 노동, 도시빈민으로, 어촌의 품팔이로 바다의 원주민들을 내쫓은 것이다. 연 수익 5천만 원의 맨손 어민 3만 명이 추방되었다. 

새만금에 자본 위주 기업이 들어와 잘살게 된다는 논리라면 대한민국의 모든 경제력을 집중하고 있는 서울의 시민들은 전북도민보다 행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서울은 세계에서도 손꼽아 주는 살기 힘든 도시의 하나이다.

 

빈부격차를 없애버리고 기계적인 수치로 나뉜 성장만을 증명하는 일인당 소득을 믿어야 하는가? 새만금에 삼성이 들어오면 과연 어민의 삶보다 행복한 것인가? 그들이 말하는 신재생에너지가 GMO 종자로 만들어지는 에탄올이라면? 그 산업은 바이오에너지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현혹한다. 이는 수만 년 한국 생태계의 질서를 황소개구리처럼 집어삼킬 것이다.

지금은 이미 부도수표가 된 ‘전북의 다음 백년은 삼성’이라는 길거리 현수막의 전혀 증명되지 않은 미래가 도민의 행복이라고 칭송하던 정치인과 관료가 있었다. 지금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작은 지역사회에서 친구이니까, 이웃이니까 그런 정치를 애써 눈감아준다. 그것은 친일파를 눈감아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삼성노동자의 평균 근무연수는 10년도 채 못 된다는 사실이 삼성 자체 보고서에도 적혀 있다. 삼성이 설령 만 명을 고용한다 해도 부안, 김제, 군산의 맨손 어업 관련 몇만 명의 상실과 내쫓김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지역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또 다른 삼성을 찾아 헤맨다.

 

   
새만금 상공에서 바라본 2023 세계잼버리대회 예정 부지.

대자본 위주의 새만금이 들어설 경우 독립적인 지역 자치경제는 무너지고 대기업에 종속된 불공정한 하도급경제가 그 자리를 메울 것이다. 기업을 위한 자치가 주민자치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새만금 농업용지가 대자본에 가는 것이 과연 성장일까? 우리가 주인이 되는 길은 없을까. 지역주민이 생산하고, 지역주민이 결정하는, 참된 자유노동 속에서 서로 그 열매를 공정하게 나누는 새만금은 없을까?

오래전 허균 선생은 홍길동전에서 이상사회 율도국을 내세웠다. 홍길동이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을 세우러 간 곳이라는 위도 앞바다에 새만금이 있다.

원래가 우리와 더불어 함께 있을 뿐인 우리가 소유하지도 않은 바다이거늘 그 누가 자본에게 팔 수 없는 바다를 팔았는가? 시애틀 대민족장의 말처럼 자본은 우리가 숨 쉬고 마시는 공기도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음 회에서 계속) / 강주영 편집위원

 

   
글쓴이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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