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Story
눈물 젖은 '비비빅' - 강주영의 <회상>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8.30  11:43:29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날이 더워 아이스께끼(빙과)를 먹는데 하필이면 '비비빅'이다. 세월이 지나니 '비비빅'에 얽힌 옛 기억을 한 토막 올려 본다. 

76년 2월에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마치고 취업한 첫 일터가 고려시멘트와 빙그레 빙과를 함께 파는 상사(商社)였다. 내가 하는 일은 서너 포의 시멘트를 사러 오는 이들에게 시멘트를 짐바(짐자전거)에 실어 주고, 시내 가게에 빙과를 배달해 주는 일이었다. 

 

   
날이 더워 비비빅을 먹다 비비빅을 배달하던 70년대를 회상하였다.

당시만 해도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다니거나, 보리박스(종이상자)에 깨엿 등을 담아 팔거나, 구두를 닦던 소년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서비스공장이라 불렀다. 어른들은 고속버스 발통(타이어)을 망치로 두드리며 점검하는 기술자가 되면 먹고사는 데 근심이 없다 하였다. 쇠를 깎는 쎈반(선반) 기술자도 최고라고 하였다. 공부는 잘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중학교를 나오면 전주고를 가지 않고 완전 무료인 국립 기계공고로 진학하였다.    

나는 그들보다는 나아서 어엿한 회사에 취직을 했다. 장사를 배우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랬는가? 훗날에 장사는커녕 반자본주의자가 될 줄 그때 짐작이나 했을까?

한 달 월급으로 5천 원을 받았다. 당시에 시내버스 요금이 20원이었나? 짜장면이 50원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아직 새가슴을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 40kg의 시멘트를 드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장사하는 소년들.

엔진에 회전쇠를 끼우고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걸던 새한 트럭이 시멘트를 300포가량 장성에서 실어 오면 전문 하역 일꾼들이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내렸다. 지게차가 없던 시절이었다. 아저씨들은 척척 박자에 맞추며 잘도 내리고 가지런히 쌓았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여서 시멘트는 불티나게 팔렸다. 시가지 가게들은 쓰레트(슬레이트)나 기와집이 많았는데 앞면을 서양식 슬라브(슬래브. 평지붕) 형태로 고치고 있었다. 지금 말로 하면 시가지 현대화 사업 정도 되겠다. 지금도 면 소재지에 가보면 앞면은 슬라브 콘크리트로 보이는데 실제 감춰진 지붕은 기와나 쓰레트인 것을 볼 수 있다.  

시멘트 일을 하다가 검정 교복을 입은 또래 학생들을 보고 나를 쳐다보면 시멘트 가루가 잿빛으로 온몸을 덮고 있었다. 스윽~ 눈물을 훔치며 빙과 냉동 창고로 달려갔다.  

   
70년대의 새한 트럭, 시동 핸들로 시동을 걸었다.

노란 바나나 우유와 비비빅은 지금도 여전히 빙그레의 효자 상품이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제품을 배달하러 가면서 뒷골목에서 한 개씩 꺼내 먹고는 하였다. 사실은 훔쳐 먹는 짓이었지만 재고 조사를 맡은 총무는 내가 상사를 그만둘 때까지 말이 없었다.

간판에 페인트로 영화 포스터를 그리던 사라진 극장 부근에서 비비빅을 꺼냈다. 드라이아이스에 손이 닿았는지 뜨거웠다. 드라이아이스가 너무 차가워 몸의 열을 순식간에 뺏으니 뜨거워진 것이었다. 나중에 야학에서 물상 시간에 배운 흡열반응, 발열반응의 발열반응이었다.

어쨌든 코를 찍찍거리며 비비빅을 먹는데 근방을 지나던 총무님에게 딱 걸렸다. 못 본 체 그냥 지나갔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사시는지? 이미 돌아가셨는지?

한번은 짐바로 빙과 배달을 가는데 언덕길에서 힘에 겨워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스박스가 깨지고 바나나우유가 대여섯 개 깨졌다. 상사로 돌아가 혼날 생각에 앞이 캄캄하였다.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어쩔 것인가?

 

   
70년대의 주요 운반 수단인 짐자전거 일명 짐바.

한참 땀을 뻘벌 흘리며 짐바를 세우고 주변 가게에서 상자를 얻어다가 아이스께끼며 우유를 주워 담았다. 상사에 돌아와 코를 빠치고(빠뜨리고) 있는데 총무님이 "야, 사내 자식이 그만한 일로 그러냐." 군밤을 한대 슬쩍 쥐어박았다. "쪽 팔려서 그래요." 

그렇게 한 일 년을 보내다 아무래도 기술을 배워야 할 것 같아서 납활자 인쇄소로 직장을 옮겼다. 비비빅을 먹다가 비비빅을 배달하던 시절을 잠시 회상하였다. / 강주영 편집위원

 

   
글쓴이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
강주영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60-022)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성당길 13. 호운빌딩 3층  |  대표전화 : 063)231-6502  |  등록번호 : 전라북도 아 00076  |  발행인·편집인 : 강찬구
등록 및 발행일 : 2014년 8월 7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현영
Copyright © 2020 전북포스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