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안희정 사건의 판결을 보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다. 나 뿐 아니라 이번 판결로 인해 직장내 성폭력을 근절시키는 단초로 삼기 위해 그동안 노력하고 염원했던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1980년대말 결혼적정기의 미혼여성이었던 내가 주변 사람들의 염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결심한 동기 중의 큰 이유가 직장내 성희롱과, 희롱을 넘어선 성폭력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

81 학번 불문학 전공이었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인테리어 디자인 코스를 1년 수료한 뒤 가진 첫 직장은 건축 투시도를 담당하는 회사로 한국에선 손꼽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 보니 명성에 비해 사장 아래에 나 같은 수습을 포함해 열 명 남짓한 작은 회사였다.

직원들 모두 20, 30대 젊은 사람들로 분위기도 유쾌하고, 사장님도 권위적이지 않고 좋으셨다. 그런데 문제는 사장님이 친구분들과 점심을 같이 드신 후 꼭 회사에 들러서 커피를 드시고들 했는데, 주로 비서 겸 경리 담당 아가씨가 커피를 만들어서 전달했기 때문에 이 일은 우리 실무 파트와는 별 상관이 없는 처지였다.

정지월 전북포스트 애틀랜타 편집위원

그러던 어느 날, 경리 아가씨가 은행업무차 나간 사이 사장님과 그 일행이 밀어 닥쳤다. 여느 날과 같이 커피 주문을 하셨는데 '미쓰리'가 없다 하니 그럼 '미쓰정'이 타오라신다. 어쩔 수 없이 갖고 들어갔으니 그 안에서 사건이 생겼다. 평소엔 별 말씀 없으시던 사장님이 "니는 남자친구가 참 이뻐하겠다.  ***가 이뻐서..."로 시작하시고, 옆 아저씨들은 키득거리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저는 남자 친구 없는데요..." 하고 나와 버렸는데 아버지뻘 되는 남자한테 그런 농담을 들었다는 게 너무 놀랍고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후엔 사장님 친구 중 한 분이 내 드래프팅 테이블에 턱 걸터 앉더니 자기랑 데이트를 하잔다. 그것도 직원들 다 듣는데서... 더 놀라운 건 내 동료들중 한명도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였다. 

너무 순진했던 나는 그 때 딸뻘되는 나를 여자로 보는 아저씨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고 경악했으며, 또 내가 여자라는 게 처음으로 수치스러웠다. 

#2

그 이후로 사장님께 계속 실망할 일만 생겨서 그 회사를 관두고 옮겨간 인테리어 시공업체는 인터뷰에 가 보니 실장이라는 30대의 오너 겸 디자이너 한 명에 야간고등학교 다녀야 하는 알바생 한 명이 모두인, 단촐해도 너무 단촐한 회사였다. 공사는 아웃소싱을 통해 하고 있있다.  

공사 맡은 게 있는지 급하다고 해서 바로 시작한 업무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추근대는 사장 거절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주말이 오는 게 두려웠다. 일도 없는데 나오라 해놓곤 드라이브를 가자는 둥 해서 수요일부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어느 날은 시공감독을 나갔는데 갑자기 야근할 게 생겼다며 밤샘작업을 해야 한단다. 근데 8월이다 보니 어디 시원한 호텔방에서 시원한 맥주 마시며 하잔다. 내일 아예 외박 준비를 해 와서 회사에서 하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그냥 됐단다. 매일 매주가 그 인간과 나의 머리싸움이었다. 원래 과민성 대장 증상을 가지고 있던 나는 장염에 위염까지 생겼다. 

일년 같은 한 달을 보내고 나는 이 업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가 실력이 안돼서 이런 직장만 만나는 게 아닐까... 그럼 공부를 더해서 좋은 직장을 찾아 가자. 대학 쪽은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사직을 하고 전주로 다시 내려가 유학준비를 했다. 투자한 학비도 못뽑는 못난 딸을 둔 부모님께 차마 얘기도 할 수 없었다.

#3

토플을 치르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마지막 단계에서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슬라이드로 만들기 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던 선배에게 좀 봐달라고 전화를 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선배였다. 결혼식장에도, 집들이에도, 아이 돌잔치에도 친구들이랑 같이 집에 가서 부인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오랜만에 언니랑 아이도 보고, 새로 이사갔다는 아파트도 볼 겸 포트폴리오 원본을 들고 갔다.  

가다 보니 그 선배의 아파트는 강변도로와 맞붙어 있는 제일 뒷동이었고, 길 중간에 무슨 창고도 하나 있고 가로등도 제대로 없어 너무 무서웠다. 버스에서 내릴 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걷다 보니 하나 둘 모두 제 갈 길 가고 나중엔 나 혼자였다. 

무서움을 무릅쓰고 걸으며, 돌아갈 땐 정류장까지 좀 바래다 달래야 겠다 생각하고 도착하니 선배가 실크 파자마를 입고 나를 맞았다.

"매너 없이 웬 잠옷? 언니랑 아이는요?" 하며 들어갔더니 혼자란다. 그래서 "혼자인데 저를 집으로 오라셨어요?" 했더니 모든 도구가 집에 있으니 손봐줄 거 있으면 집이 편하단다. 'OK !!!'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겨울인데도 히터를 안틀었는지 너무 추웠다.  

집이 춥다고 하니 방에서 기다리란다. 작품 두 개 정도가 더 세심한 컬러링이 필요한 거 같아서 자기는 거실에서 하겠다고... 우두커니 방에서 30분쯤 있으니 갑자기 방으로 들어 오더니 나에게 덤벼들었다. 너무 놀라 '왜 이러세요?' 라며 밀치고 반항하며 소리쳤다.  

엎치락뒷치락 몸싸움을 하다 난 방바닥에 게딱지처럼 엎드렸다. 그러면 어떻게 못하리라고 생각해서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레슬링의 파테르 자세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체구가 왜소했던 선배는 힘이 빠진건지 아니면 하도 어이가 없어서인지 그 시점에서 포기한 것 같았다.  

나는 울다 말고 선배에게 무서우니 택시정류장까지 데려다 달라 했다. 그 순간 내 생각엔 아는 사람도 저러는데 모르는 사람은 더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콧방귀를 뀌는 선배와 동틀 때까지 한방에서 벽에 기대어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어둠이 가시자 마자 그 집을 튀어나왔다. 

육체적 폭행은 면했지만 내 정신과 영혼은 한동안 혼돈과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온몸과 오장 육부까지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모멸감과 인간에 대한 배신감은 지금까지도 큰 흉터로 남았다. 

나는 나와 함께 그 선배집에 자주 갔었고, 나만큼 그 선배와 친한 친구 한사람에게만 얘기를 했고, 봄에 입학 허가를 받고 그 해 여름 한국을 떠나왔다. 교포와 결혼을 했기에 한국에 못 돌아갔고, 몇해 후 한국을 방문해 친구를 만났더니 어떻게 누굴 통해 들었는지... 얼만큼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끼가 많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낸 듯 했다. 

난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었기에 실소로 일축하고 말았지만 피해자인 내가 그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게 한참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재미도 없는 이 이야기를 세세하게 쓴 이유는, 어떤 시점에서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알아야 하고, 거기에 대해 내 입장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1 에서,

나는 그날 빨간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나의 빨간 스커트가 평소엔 방정했던 남자들을 도발했다? -  "평소 같았으면 나는 그날 사장실에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의 동료들은 회사 내, 아니 사회 내에 이미 팽배한 성희롱 문화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정도의 희롱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2 에서, 

전 여직원의 전화 통화를 통한 암시와 아웃소싱쪽 사장님의 간접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려 한달이나 버텼다? 유부남사장이 잘 생겼던데 그래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 "거의 모든 상사는 대체로 유부남이다. 싱글남자가 그럴 경우 나랑 썸 탄다는 오해라도 할 수 있다."

#3 에서, 

왜 남자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냐고...? 왜 그의 집까지 갔고, 가족 없이 혼자 있는 걸 알았을 때 바로 나오지 않았느냐고? - "우리는 무턱대고 친한 남자사람을 범죄자로 보진 않는다." 

아무리 추워도 방엔 왜 들어갔냐고? - "2월에 불기 하나 없는 냉골 바닥에 30분이상 앉아 있어 봐라."

왜 그런 일을 당했으면 밤중이던, 아무리 밖이 무서워도 바로 뛰쳐 나왔어야지 밤을 새웠냐고? - "그 녀석이 전의를 상실한 이후로 더 이상의 몸싸움은 없었다." 

모두들 아무리 많은 이유로 날 공격한다 해도 나는 피해자였지 가해자가 아니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 이런 비슷한 말과 행동 하나 해 본 적이 없고, 이런 상황은 염두에 두어 본 적도 없고, 내가 이런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해 본, 그저 직장 하나를 갖고자 노력해 왔던 생활인이었을 뿐인 피해자 말이다.  

그런 이유로 가해자 안희정 재판이 피해자인 김지은의 재판이 되어 버린 현 사태에 심히 분노를 느낀다.

같은 여자들까지도 김지은이 피해자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남자측의 농간에 너무 쉽게 놀아난다. 그럴수록 나쁜 남자들에게 유리한 판을 짜주고, 앞으로도 계속 피해자를 양산해 내는 면죄부를 쥐어준다는 사실을 묵과한 채 함께 마녀사냥을 해댄다. 

피해자인 김지은의 도덕성을 논하기 전에 가해자 안희정의 도덕성과 이 사회의 도덕성을 논하고, 적어도 도덕의 마지노선을 그어 주는 재판부의 도덕적인 판결을 2심에서 기대해 본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여자들만의 외로웠던 싸움에 몇몇 멋진 남성들이 동참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남자의 힘을 의지해서라기 보다는 공감해 주는 남자가 늘어날수록 맞서 싸워야 할 남자의 수가 줄지 않겠는가 하는 소극적이고 고질적인 피해의식 때문이다. 적어도 이 남자들은 여성을 동료로, 학우로, 딸로 대할 줄 아는 상식적인 도덕을 가진 사람들일 테니까 말이다. 

김지은 화이팅! 모든 성 피해자들 화이팅!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 정지월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