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히던 볕이 땅거미 질 때쯤 으등그러졌다. 잠시 그러려니 하고 여름밤 달빛을 보려고 마실길을 나섰다. 전주 한옥마을을 남으로 에워싼 남고사 저녁 종소리가(남고모종 南固暮鐘) 연기 퍼지듯 민가에 스며들더니 왜바람이 불었다. 흰옷 입고 빨래하는 여인네들을 이르는 남천표모(南天漂母), 남천교 청연루에서 십여 명 길동무들과 여름밤 마실길을 나섰다. 

미리내 '바람쐬는 길'로 마실길을 나선 길동무들.

출발지 남천교서 한벽당을 지나 좁은목에 이르는 지세는 태극이다. 고덕산과 그 산 좌우를 잇는 능선의 뫼태극과 한벽당의 앞을 돌아 나가는 미리내(전주천의 옛이름) 가람태극이 맞물려 휘감는다. 성리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가 태극이다. 서양문법으로 말하면 보편과 개별, 특수의 결합자이다. 다른 말로 온전한 곳이니 온전할 전(全)을 써서 전주(全州)이다. 하니 견훤이 왕도로 삼고 성을 만들 만한 곳이다. 

미리내(전주천 별칭)를 오른편에 끼고 옥류동 한벽당을 거슬러 승암마을, 천주교 순교지 치명자산, 애기바위, 각시바위, 서방바위를 지나 월암산 밑자락 색장리 인적교까지 걷기로 하였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한참 흐드러진 백일홍처럼 넘치는 이야기가 여울져 좔좔좔 흐른다.

색장동까지 미리내는 세 번을 굽이치는데 애기바위, 각시바위, 서방바위로 부른다. 1403년 조선 태종 3년 원님의 딸 연화낭자와 정판서의 손자 정용은 학이 살아가는 전주 서학동(棲鶴洞)에서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에 나선 정용은 황소만한 호랑이의 공격을 받아 숨지고 미리내를 따라 떠내려 오자 연화낭자는 남편이 있는 물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고 하다. 

땅거미가 지는 승암마을 부근의 전주천.

다른 이야기도 있다. 서방바위 위 월암산 밑이 정여립 생가터이다. 기축옥사로 마을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역적의 수괴 마을이니 불사르고 못을 팠다. 진동규 시인이 이리 썼다. “그 처참한 현장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마을이 변해서 된 소를 휘돌아 내려가는 물길, 물길마다 한 서린 이름이 생겼을까? 서방바위, 한굽이 돌아 각시바위, 또 한굽이 돌아 애기바위.. 떼죽음의 한이 서린 명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동으로 전주 으뜸 뫼인 기린봉이요, 남으로 후백제 옛터 남고산성이다. 남고산성이 자리한 고덕산 북쪽 끝자락이 초록바위이니 천주교인과 동학하던 이들이 순교한 곳이다. 자만동, 옥류동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가 터를 잡았고 오목대에서는 이성계가 대풍가를 읊었다. 대풍가를 듣고 한 잔 술을 마시던 정몽주가 말을 달려 고덕산 만경대에 우국시를 남겼다.

십여 리 남으로 자리한 월암산 밑은 천하공물(天下公物)의 새 세상을 꿈꾼 정여립의 생가터이다. 동서남북이 모두 다 옛이야기를 기린봉이 달을 토해내듯(기린토월 麒麟吐月)한다. 옛이야기를 국밥집 아짐이 뚝배기에 개운한 국물을 토렴하듯이 주억주억하며 싸목싸목 걷다 보니 불현듯이 색장마을 색장교에 이르렀다. 길동무들 두엇이 징검징검 내를 건넌다. 

월암산 봉우리로 바람은 달을 밀어 올리고....

색장동 인적교에서 바라보는 고덕산은 수컷이요, 색장마을 뒷쪽 산은 담을 친 것 같은 ‘막은담’으로 틀림없는 여근곡이라들 한다. ‘막은담’은 ‘막은대미’로 변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자어로 바꾸게 되는데 이때 ‘막은 담’을 막을 색(塞)자에 담장 장(牆)자를 써서 색장리(塞牆里)로 하였는데 훗날에 색장리(色長里)로 바뀌었다. 생동하는 기운의 다산과 풍요의 장소이다. 색장리 인적교에서 바람을 맞으니 찬 계곡물이 등에 흐르는 듯 시원하다, 앞섶을 슬그머니 풀고 더운 가슴을 식힌다.

전주에는 3대 바람통이 있었다 한다. 승암마을 앞의 ‘좁은목’, 미리내 싸전다리의 ‘초록바위’ 옛 해성학교 자리 ‘숲정이’를 꼽는다. 공교롭게도 이 바람통 자리는 처형지 또는 순교지이다. 오늘 걸은 길이 좁은목을 지나는 미리내 바람쐬는 길이다.

더운 가슴 식히는 바람(風)통이요, 바라고 바라는 바람(希)통이요, 옛과 오늘이, 동과 서가, 벗과 벗이 통하여 막힌 가슴을 뚫으니 소통길이다. 왕조창업과 모반의 꿈이 가득하니 과연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갈마음수지세(渴馬飮水地勢)이기도 하다. 

길을 나설 때에는 구름에 가렸던 보름달이 남쪽 월암산으로 휘영청하다. 기린토월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월암토월을 봤으니 그 기운 또한 맑게 흐뭇하다. 달빛 내린 여울이 물비늘을 퍼득이며 맑게 빛나면 갈대들이 두런두런거린다. 목로에서 오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를 기다리며 두런두런하였던가?

한벽당 아래 옛 전라선 철길 터널.

월암산 보름달과 그 오른쪽 아래로 새하얗게 빛나는 토성이 어미말과 송아지처럼 하나로 움직인다. 바람은 사드락사드락 월암산 골에서 달을 밀어 올리고, 여울은 조랑조랑 아이 글 읽는 듯 한데, 여름 풀벌레 소리는 다르르 다르르 바위를 구른다. 어두운 길의 남쪽 소실점으로 애반딧불이가 무리진다.

예감할 수 없는 날들이 뒤집어 얼크러져 슬치더미(봉우리)로 밀려 온다. 남으로 전라도 가시내 곱고도 여린 손처럼 흐르는 오백여 리 섬진강이요, 동북으로 거꾸로 흐르는 구백팔십여 리 비단강(금강)이라. 남쪽 월암산을 지나 미리내가 발원하는 곳이 슬치고개이다. 비단강 남쪽으로 물이 남북으로 경계를 이루는 곳이 슬치고개이다. 슬치 남쪽으로는 물들이 남으로 흘러 남해로 가고, 슬치 북쪽으로는 북으로 흘러 서해로 빠진다. 

슬치고개 아래 오원천이 달래강(섬진강의 옛이름)의 본류이다. 달래강 발원지인 데미샘은 진안 상추막이골에 있다.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를 ‘천상데미’라고 한다. ‘데미’라는 말은 ‘더미(봉우리)’의 전라도말이다. 달래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으로 ‘천상데미’라 불렸다.

천상데미를 넘으면 장수 수분재이니 여기서 비단강(금강의 옛이름)이 숨 쉬기 시작하여 북으로 흐르다 서해로 빠져 나간다. 그 물길 생김이 서울을 향해 휘니 거슬러 활을 쏘는 반궁지세(反弓地勢)이다. 뜨거운 남도라 했던가?

한벽루에서 바라보이는 7월의 보름달.

전주 남쪽 모악산에서 비단강 동서 끝에 시위를 메겨 화살을 당기면 계룡산을 지나 서울을 향한다. 하여 모악산과 계룡산은 다시개벽(후천개벽 後天開闢)의 기운이 생동하는 곳이다. 원불교, 동학, 보천교, 증산교 등이 모두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길을 되짚어 다시 남천교에 이르니 달은 어느덧 고덕산 봉우리에서 학산으로 넘어간다. 정갈한 한정식 집 다문의 마루에서 달은 앞채 용마루의 한가운데에 걸렸다. 용마루 오른쪽으로 교동 원불교당의 일원상이 하얗게 빛난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해야 한다’고 했던가? 다문의 우물로 달빛이 쏟아진다. (21회에서 계속) / 강주영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