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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전주를 사색하다 - 한옥마을에서 개벽마을을 생각한다<신년기획>전라도 정도(定都) 천년...'동방의 등불'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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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7  06: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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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기념관에서 한옥마을 속으로 들어왔다. 잿빛 콘크리트 도시는 욕망의 색조이다. 도시 공간은 계급•계층적이다. 신시가지와 원도심, 전통 마을은 대칭적이다. 도시의 조정 기능은 신시가지에 몰려 있다. 도시의 공간은 욕망을 생산하고 그 찌꺼기를 쏟는다. 끝없이 공간을 계급화 한다.

오죽하면 하느님, 부처님 위에 건물주가 있다고 할까? 도시계획을 세금으로 집행하여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 임대료도 오른다. 취득세 등록세를 건물 규모에 맞게 내고 임대 소득도 낸다. 하지만 세금으로 만든 도시계획의 혜택을 갚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여전히 불로소득이다.     

 

 

   
한옥의 선들은 지향으로 오르되 절제한다. 하늘로 벌려 하늘을 고요히 품는다. 전주 한옥마을.

전주의 서쪽에는 관공서와 기업 건물이 몰린 혁신도시와 신시가지가 있다. 동쪽에는 원도심과 전통 마을이 있다. 전주는 서진했다. 동쪽은 버려진 마을이었다. 다행히 시청은 동쪽에 있다. 욕망의 회색빛 콘크리트에 대칭하여 '한옥마을'이라 이름지었을 것이다.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은 ‘느린 삶’, ‘본디의 한국적 삶’을 떠올리게 한다. 

정명(正名)이 무엇인가? 바르게 이름 지어 대의명분을 잡는 일이다. 대의명분은 민심이 바라는 것이다. 민심이 곧 천명이다. 천명을 받들어 이름을 짓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다. 온전한 고을이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온고을’, ‘전주’(全州)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한옥마을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이치가 실재한다면 그것으로 정명할 일이다.  

대의명분인 보편적인 이치인 리(理)는 그 자체로서는 실재하지 않고 오로지 개별적인 사물 즉 한옥, 지붕, 우물, 담장, 매화, 산수화, 노동 등의 개별적인 기(理)를 통해서만 드러나는가? 주기론적인 이기일원론이다. 보편적인 이치가 그 자체로 실재하여, 그것으로 마을의 삶과 공간을 조성했을 것인가? 주리론적인 이기이원론이다.

아니면 눈, 코, 귀, 입, 눈의 오감으로 경험되고 느껴지는 것들의 기를 찾아 리를 구성했는가?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인가? 리와 기는 서로 구분되고 섞일 수 없는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인가? 마을을 구성하는 원리인 마을의 리는 무엇이고, 그것들의 감각과 경험으로서의 골목길, 담장, 한옥, 장독 등 마을의 기는 무엇인가?

 

   
전주의 옛모습.

어느날 모악산 자락 독배마을에서 전주의 명창 고양곤의 진도아리랑을 들었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수심도 많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그가 혼자서 부르면 개인의 기(氣)아리랑이요, 놀이 마당에서 좌절된 개벽의 한, 그리움의 한을 서로가 교감하고 어우러져 부른다면 그것은 민족 리(理)의 아리랑이다. 

시대에 따라 상대적인 보편의 이치인 리는 개별 실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개별 실체를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도 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혜강 최한기는 기의 입장(유물론)에서 기와 리는 통(通)하며, 이와 기는 서로 활동운화(活動運化)한다고 하였다. 마을의 사람과 만물은 늘 서로 통하고 활동운화한다. 동학의 날마다 하늘을 먹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공간이 마을이다. 서로서로가, 만물이 날마다 서로의 하늘을 먹는다. 

과연 한옥마을은 개벽했다. 개벽이되 쇠락한 슬럼가에서 한 해 천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지로 개벽했다. 돈이 모이는 곳으로 개벽했다. 개벽했으되 대동마을 복원이 아니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경쟁하는 자본마을로 개벽했다.

한옥마을 복원의 기획자들은 과연 무엇을 복원했는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화장실이 중앙에 있다. 생리현상을 이용하여 상품을 최대한 노출시키는 상업주의 건물이다. 백화점도 최대한 상품을 노출시키는 동선을 계획한다. 한옥마을 공간은 복원했으되 개인주의와 자본에 종속시켰다.    

한옥마을은 1977년 현상 동결적인 ‘한옥마을보존지구’로 지정된 뒤 ‘전통한옥지구·전통문화지역·전통문화구역·전통문화특구’ 등으로 불리다가, 2002년 10월 '전주시 공공시설 등의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한옥마을을 전주시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오목대에서 바라본 은행로 한옥의 야경.

“한옥마을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교동일대에 면적298,260㎡이다. 주민등록상 인구 현황은 1,322명(남 619, 여 703)으로 세대수 653이다. 건물 현황은 776동(한옥 605, 비한옥 171)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 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도로(全群道路)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삶과 관광이 어우러지지 못한다. 공간조형미만 만들었다. 삶을 법고창신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옛 전통이 보이지 않는다. 관광지는 있으나 삶을 이루는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한옥마을이라는 이름부터가 꺼림칙하다. 양복을 입고 갓을 쓴 느낌이다. 혼이 없다. 삶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빌딩에 대칭한 공간조형적 이름이다. 풍경에 혼이 없는 이름이다. 새로 만든 한옥, 일제강점기의 집장사가 지은 한옥, 근대 일본풍의 적산가옥, 향교 등의 전통 한옥이 뒤섞여 있다. 그러더라도 삶이 모여지고 공간에 쌓여서 문화를 만들고 ...

그런데 삶을 사는 주민들은 지난 10년 간 반으로 줄었다. 미장원, 이발소, 세탁소, 한약방, 구멍가게, 선술집 등은 사라졌다. 살기에 불편한 마을이 되었다. 초창기 한옥마을 개발의 원동력이 되었던 문화예술가들은 쫓겨났다. 개발의 열매는 상업자본이 먹는다. 한옥마을 일원에서 벌어지는 축제도 관련 단체들의 이익일 뿐이다. 

한옥마을은 손님의 마을이지 주인의 마을이 아니다. 마을 안의 주인님은 주인놈이 되어 마을 밖으로 내쳐지고 마을 밖의 사장님과 손님이 주인님이 되었다. '놈"과 '님'이 뒤집어지고 대립한다. 돈과 삶이 뒤집어지고 대립한다. 없다. 이천식천이 없다. 욕망만이 가득하다.

 

   
왕의 뜰 경기전에는 오방빛이 어리비추고 백성의 골목길에는 막걸리 냄새가 번졌다.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 ‘한(限)’도 보이지 않는다. 한은 좌절된 '다시개벽'이다. 슬픈 애상이 아니다. 한 사람인 '민'의 정서로 보면 대접받지 못하는 삶이 다시개벽이 못됨도 한이요. 민들의 무리인 민중이 마을의 주인이 되지 못함도 좌절된 다시개벽의 한이다. 앞서 말한 개인 기의 아리랑도 민족 리의 아리랑도 없다. 

골목길은 차가 다닐 수 없다. 차가 없던 삶의 이치이다. 담장이 낮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던 삶의 모습이다. 공동체이다. 낮은 담장을 통해 이웃과 삶을 나눴다. 냉장고가 없으니 음식을 보관하지 않고 이웃과 나눴다. 이웃집에 매화가 피면 같이 즐겼다.

자연스레 얼굴을 보게 되니 이웃사촌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다. 담장의 선은 직선이 아니고 물 흐르듯 한다. 도시에서 개인으로 살다가 귀농 또는 귀촌한다. 이웃의 관심을 삶의 공유로 받아들이지 못해 간섭으로 여긴다. 그 간섭이 싫어 다시 도시로 나간다. 개인주의가 내면화되어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낮은 담장(기)이 드러내는 나누는 삶의 이치(리)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공동체의 평화가 아니고 개인주의적 평화였다.   

어릴 때 살던 집은 우물을 네 집이 같이 썼다. 플라스틱통에 음식을 넣어 우물을 냉장고로 썼다. 한 집에 두어 개씩 달아맸다. 아무 통에서나 꺼내 먹었다. 꺼내 먹은 만큼 다른 음식을 넣었다. 

삶의 염원으로 담장에 기쁠 희(喜)나 복 복(福)자를 기와 조각 등으로 새겨 넣었다. 지나는 모든 이들이 글자를 보고 자신뿐 아니라 마을의 안녕을 빌었으리라. 대문에 문지방이 있다. 건축 구조에서는 의미가 없는 덧목이다. 경계이다.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다. 집에 들 때 밖의 일을 들여서 집안의 평화를 깨지 말라는 마음의 다스림이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집에 드는 손님 또한 마음을 다스려 들라는 뜻이다. 

   
대문의 아래 문지방은 경계가 아니라 집에 드나들 때에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의 한옥마을 주민들은 이성계가 대풍가를 부른 오목대와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날마다 보면서 망국의 서러움을 곱씹었을 것이다. 선술집에서 쑥대머리 소리를 부르며 옥중 춘향이의 그리움을 광복의 그리움에 투영했으리라. 기의 소리가 리의 소리가 되었다.

한옥에서 초가의 선은 뒷산의 모양을 닮았고 기와의 선은 양끝을 잡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늘어진 새끼줄의 선을 표현한다. 처마는 후림과 조로를 두고 용마루의 가운데를 처지게 하여 자연스러운 형태를 나타낸다. 팔작지붕은 아홉의 곡선을 가졌다. 용마루의 곡선, 좌우지붕선, 앞뒤 지붕선이다. 위에서 아래로의 경사도 곡선을 가졌다.

그 선들은 날아갈 듯 말 듯 하다. 버선코 같고 연분홍 저고리의 소매선과 같다. 그 선을 두고 누군가 은근함과 끈기라 하나 그리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향(志向)으로 오르고, 오르되 절제하는 조화이다. 기와집의 선은 하늘로 오목하고 초가의 선은 땅으로 오목하다. 양민의 삶이야 땅을 품어야 생산하는 이치이니 아래로 오목하다. 하늘과 땅의 보편적인 리를 담되 지나치지 않게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담는다. 기를 잊지 않으니 헛된 명분에 빠지지 않는다. 

뜻이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한옥의 선을 필자는 그리 본다. 이 선들은 마당에서의 온갖 행동으로 드러난다. 음식을 하고 타작을 하며 놀이를 하고 잔치를 한다. 마당에서는 삶이 일어난다. 마루가 마당을 이어주고 내밀한 방에서는 뜻을 가다듬고 휴식을 한다. 마당에서 어우러지되 서로서로 다른 공간으로 간다. 안채, 사랑채, 별채 등의 채나눔이 한옥의 원리이다.  

 

   
한옥 골목길의 낮은 담장은 너와 나의 경계가 없이 삶을 나누는 협동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서학은 박다옥(전주 최초의 서양식 콘크리트 건물)의 황금싸롱에서 가베(커피)와 아사히삐루(맥주)를 마셨다. 둘 다 쌉싸름하다. 축음기가 지지직 돌아가며 나팔관 소리통으로 노래가 나온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흥, 윤심덕이는 김우진이랑 현해탄에서 죽었다지. 남포등이 흔들린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카락이 머루 껍질처럼 빛이 난다. 양장 우와기(상의) 자락이 대정길(동문길) 바람에 떨린다. 이상이 그랬다지!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금용조합을 끼고 서학은 길을 오른 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내선일체 황군에 나가자’고 쓰여진 현수막이 조합 건물 꼭대기에서 날린다.

서학은 참을 수 없는 토를 느껴 어둑한 골목 한구석에 쏟았다. 세모 반듯한 모임지붕에 수직창을 가로 세로로 나누고 기단은 공구리(콘크리트)인 경찰서장 관사 너머로 경기전이 드러났다. 왕의 뜰 경기전에는 매화가 피고, 백성의 골목길에서는 탁주 냄새가 번졌다. 선술집 덧문 틈으로 왠 장터 소리꾼이 소리를 한다. “쑥대 머리 적막 옥중에 찬자리요.....”

팔작지붕 추녀 끝을 타고 도는 바람 같기도 하고, 그믐밤 대숲에 이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지” 젓가락 장단 추임새가 소리를 돋는다. 텁텁한 탁주보다야 쌉사름한 삐루가 아쌀하지. 만주로 가야하나. 만주보다는 상해로 가야하나. 아니지 동경으로 가야하나. 겨드랑이가 가려웠다.
  
잠시 재미삼아 한옥마을 입구의 동문길(일제강점기의 대정길)을 걷는 모던 신청년을 소설 문장으로 썼다. 작중 인물 이름은 동학이 아닌 서학이다.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드나들고 고사동에서 일본이 들여온 서구의 근대를 시나브로 동문길을 통해 한옥마을로 이식했을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의 고여 썩여 형식만 남은 성리학을 경멸했을 것이다.

모던과 썩은 성리학 사이에서 개벽 성리학을 가졌던 선비들은 괴로웠으리라. 개벽 성리학이 동학 아니던가? 성리학의 이기론이 동학의 이천식천이 된 것이다.(이천식천은 졸고 16편 참조) 모던 신청년들의 개인주의적 이성과 동학의 시천주성이 대립하였을 것이다. 고(古)는 낡은 것이 되고 금(今)은 새로운 것이었다.   

한옥마을 복원의 설계자들은 근대의 개인주의적 이성의 한 형태인 상업주의를 이식했다. 공간 조형을 복원하되 ‘장소의 혼’이 없다. 옛의 아름다움은 복원되지 않았다. 어느 전통마을이라도 당산나무가 있고 모정이 있고 마을 마당이 있었다. 한옥마을에는 마을 전체 주민들이 만나는 마을 마당이 없다. 어떤 기능을 하는 센터들은 많으나 그 센터들은 전문단체들의 것이다.

일상적 삶이 서로 돕고 사는 이치인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하는 공간인 마을 마당이 없다. 마을의 리 유무상자를 실현하는 기로서의 마을 마당이 없다. 서구적 조형원리에 전통의 무늬를 덧씌었을 뿐이다. 천박하다. 깊어 웅숭거리는 숭늉 맛이 없다. 산뜻하지만 깊지 않다.

 

   
빛의 경계에서 새순들이 올라오는 봄밤이었다. 사진은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경기전 담장.

큰 마당에 장독대 500여 개쯤 두고 실제로 사는 주민들로 하여금 각자의 손맛으로 ‘느린음식’인 ‘슬로푸드’를 담게 하면 어떨까? 자연스럽게 동아리가 만들어져 협동하는 삶을 복원할 것이다. 전문 청년들이 마케팅을 담당한다. 전주시가 품질을 보증한다. 전주 한옥마을 장독대 ‘느린음식’은 공동체의 상징이 되고 전국으로 불티나게 팔려 갈 것이다.  

한옥마을의 중심 두 길이 태조로와 은행로이다. 커피, 꼬치, 만두, 떡갈비, 치즈, 만두, 햄버거류, 한정식(?), 국적불명의 퓨전 음식이 어지럽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 전통문화와 전통음식거리로 할 수는 없었을까? 다른 문화와 음식은 한옥마을 외곽에 별도로 특화 할 수는 없었을까? 하더라도 그 공간의 반절 이상을 마을의 공동체가 운영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한옥마을에서 판소리 대본을 구할 수 없다. 완판본 춘향전과 홍길동전을 살 수가 없다. 주민공연단이 한 달에 한번 전통 장례를 하고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소리를 할 수는 없는가? 그 마을 마지막 주 무슨 요일에 가면 전통 상여 행렬이 있다더라.

오행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 중에 흙의 날 토요일이 좋겠다. 흙으로 활동운화한다. 소리꾼이 상여소리를 하고 상여꾼과 관광객이 받는다. 만장을 50개 쯤 준비한다. 관광객이 들면 된다. 상여꾼도 관광객을 참여시킨다. 노제를 하면 주변 상가에서 막걸리를 내온다. 장례라 하여 엄숙할 일도 아니다. 해학과 풍자가 섞인다.  

천하무인(天下無人)은 하늘 아래 남이 없다는 민주 평등의 대동이다. 다름으로서 같음을 구하는 동이상보(同異相輔)이다. 대동은 일치단결이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고 다름으로 서로를 보완하는 동이상보이다. 천하는 '민심이 천심이다'는 말처럼 민중의 마음이 모인 곳이다. 대동은 민중의 마음이 모인 곳에 너와 나가 따로 없음이다. 마을천하론은 마을에서부터 민중의 마음이 모이는 대동을 실천하자는 생각이다. 

 

   
글쓴이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

은퇴가 없는 곳, 중년의 위기를 보듬는 곳, 은발의 지혜가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곳, 목로에서 정치보다도 이웃을 말하는 곳, 삶을 나누며 나이드는 곳, 인문의 향기가 은은하여 세상을 품는 곳, 팔기보다는 살아지는 곳, 민심이 천심이어서 천심으로 마을을 품는 곳......이곳을 대동마을이라 한다. 

한옥마을에서 아름다운 옛을 살린 내일의 대동마을을 꿈꾼다. / 강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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