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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주를 사색하다 - 동학혁명기념관에서 ‘다시개벽’을 생각한다. 2<신년기획>전라도 정도(定都) 천년...'동방의 등불'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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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1  12: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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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은행로의 동학혁명기념관에서 신동학을 생각한다. 지난 글에서 근대성과 관련하여 동학을 생각했다. 동학을 ‘개화근대’라 하지 않고 ‘개벽천하’라 하였다. 근대라는 말이 주는 시간과 공간의 분단성이 싫어서였다. 조선 말기의 ‘개화파’가 가진 ‘근대로의 길’에 동의할 수 없어서 ‘개벽천하’라 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삶이 쌓인 역사에는 사상과 민중의 삶이 있었다. 동학(이글에서는 동학을 서학과 대칭하여 사용한다. 1894년의 민중의 봉기는 ‘동학혁명’으로 종교로서의 동학은 ‘천도교’라 한다.)을 생각하면 ‘인내천’, ‘후천개벽’, ‘동학혁명’이 곧바로 떠오른다.

근대의 국민교육은 서구적 문법이어서 ‘인내천’, ‘후천개벽’ 등의 말들은 왠지 고루해 보인다. 동과 서의 분단이다. 옛과 오늘의 분단이다. 동서고금 합작을 생각한다.

 

1. 다투는 개인의 이성

먼저 서학을 들여다본다. ‘이성적이다’, ‘합리적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근대의 이성을 만물을 인식하고 거짓과 참을 구분하며 실천하는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이치에 부합하게 행동할 때 우리는 합리적이라 한다. 인간 초월적인 절대자아인 신성 혹은 절대이성과 구분한 이성적 인간을 서구에서는 합리적 개인이라 한다. 너무나 좋은 말이다. 

 

   
동학혁명기념관 로비에 걸려 있는 박홍규 작 <새날을 여는 사람들>

문제는 천부인권의 개인이다. 모래알 같이 많은 개인들의 이성이 모두 다르다. 레스토랑에서의 교양 있는 대화의 우아한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개인과 개인의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검투장이 펼쳐진다.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가난한 자, 부자, 권력을 가진 자, 못 가진 자로 살아간다.

‘평등한 개인’이라고 하지만 말만 그렇다. 도무지 평등하지 않다. ‘합리적이다’는 말에 대칭하여 ‘철이 없다’는 말이 있다. 술값 잘 내고, 이웃에 오지랖이 넓고, 물건을 싸게만 사려 하지 않고, 남한테 잘 퍼주고... 이럴 때 우리는 보통 ‘언제 철들래.’한다. 철들고 싶지 않다.  

개인의 이성이 서로 다투기에 절대이성 또는 보편이성이 필요해진다. 하여 헤겔은 나폴레옹을 말을 탄 절대이성이라 불렀다. 절대이성의 담지자가 바로 국민국가였다. 봉건제의 질곡에 시달리던 당대의 헤겔에게는 봉건제를 대체하는 근대 국민국가가 절실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 근대 국민국가는 부르주아지 국가였다.

이 국민국가가 한 일은 식민지를 강점하거나 국가들끼리 전쟁을 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 것이다. 헤겔은 국민국가를 보편이성, 절대이성의 담지자로 여겼지만 국가 역시 정글에 던져진 개인일 뿐이었다. 시민적 이성의 집결체가 아닌 국가 자신이 힘이 센 횡포한 개인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하여 근대의 이성은 각종 조직에 인권 또는 이성을 개인과 동등하게 주었다. 참으로 평등(?)하다. 바로 법인격이다. 약칭 법인(法人)이다. 재단법인, 사단법인, 기업법인, 등기, 특허, 지적재산권, 가족등기... 이 모든 게 법인이다. 이 법인의 실체는 개인의 재산권 보호이다. 돈에다 인권을 주었다. 

 

2. 평등하게 찍어낸 한 무리의 개인  

마르크스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헤겔의 관념적 사고를 유물론으로 뒤집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 국가, 법인, 개인을 계급성을 가진 프롤레타리아로 역전시켰다. 참으로 ‘멋진 신세계’였다. 동학의 문법으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부르주아지혁명에서 ‘다시 개벽’이었다. (수운은 한글로 지은 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다시개벽’으로 말했다.)

그런데 역사상의 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적 이성이 당과 국가에 집중되었다. 자리바꿈만 있었을 뿐 변한 게 없다. 프롤레타리아 국가 역시 개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수의 부르주아지가 타도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잡았으니 ‘멋진 신세계’, ‘다시개벽’이 되었을까? 오히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는 마르크스 자신의 말대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는 당과 국가의 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개인인 붕어빵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예기 예운 편의 대동사회를 견주어보자. 

“그는 사냥꾼, 어부, 목동이거나 비판적인 비평가이다. 생활수단을 잃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는 그래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분야에서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한다. 그래서 사회는, 내가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내가 사냥꾼, 어부, 목동, 또는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단지 마음 가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게 된다.”-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

 

   
손화중 전봉준 손병희 흉상과 배경은 이기홍 작 '혁명전야'.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대동).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민주 평등),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공동체). 나이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여지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복지).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공유제).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평화).”- 예기 예운편-

 

유토피아가 다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생산력이 넘쳐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예기의 예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이 아닌 관계 속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 역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관계를 말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이미 대동에서 훨씬 더 구체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아닌 공동체에서 평등을 담지하는 자율과 자치였다. 생활의 협동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서구의 합리주의를 ‘권력의지의 표상’, 개인이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권력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고 하였다. 푸코는 좌우파 모두 '근대적 인간', '근대적 개인'은 생산되고 주조하고 세뇌된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어리석은 독재자는 국민들을 쇠사슬로 묶어두지만, 현명한 정치가는 녹도 슬지 않으며, 감시원도 필요 없는 관념의 사슬로 인민들을 엮는다. 한번 길들여진 부드러운 뇌세포는 영원한 제국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다."고 한다. 아울러서 푸코는 서구 좌우파의 “정치학과 정치사상은 아직까지 왕의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으로 푸코는 1979년 이란혁명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좌/우 및 종교의 극단을 배제한 80%의 일반 의지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사회계약과 역사계약을 견인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니요, 좌/우 근본주의도 아닌 성/속 합작의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며 독보적인 체제를 일구게 된다. 푸코는 테헤란에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과는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혁명적 혁명’을 목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좌/우 혁명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창조적 혁명', 진정한 '문화대혁명'이었다. 나는 불길처럼 뜨거운 그의 문장에 녹색 밑줄을 치고, '계몽 이후의 개벽'이라고 말을 보태었다.”-이병한, 유라시아견문, 「누가 촛불을 낚아채는가?」, 프레시안, 2017.6.17 -

서구식 민주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병한의 이런 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냥 그런 견해도 있다고 생각하자. 

 

3. 시천주(侍天主) - 개인의 이익이냐, 민중의 이익이냐

서학이 이성을 외칠 때 동학은 천성과 인성의 합일을 말했다. 동방에서 천성은 개인과 떨어진 그 어떤 초월적 자아가 아니다. 천성은 개인인 민들이 모여서 만든 민심이다. 곧 민심이 천심이다. 천명을 듣는다. 민중의 눈이 하늘의 눈이요, 민중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이다.(天視自我民視천시자아민시 天聽自我民聽천청자아민청-書經 泰誓中 서경 태서중) 이를 유학에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했다.

민중과 동떨어진 개인의 이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학은 천일합일을 사대부와 선비에게서만 구했다. 서구의 문법으로 말하면 개인인 민이 아닌 민의 무리 민중이 만드는 민심이 곧 절대이성이다. 쉽게 말하여 민중의 이익이 정의이고 절대이성이다. 동방은 이를 ‘천명’이라 하였다. 유가는 이를 사대부에 한정하고, 묵자는 노동자에까지 넓혔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소수 사대부의 천하를 다수 민중의 이익이 곧 천심이라 한 이는 묵자였다. 겸애(兼愛) 곧 평등을 주창했다. 목수인 묵자(BC479?~BC381?)는 마르크스(1818~1883)보다도 2천2백 년을 훨씬 앞서 노동가치를 주장했다. 묵자는 봉토를 받고 귀족이 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목수로 살았다. 몸소 노동자를 조직하여 오늘날의 생태주의라 할만한 절용(節用)운동과 초과소비인 전쟁을 반대한 인류 최초의 평화, 생태,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다. 

“인간은 다른 짐승들과는 달라서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묵자/비락, 금인여차이자야 뢰기력자생 불뢰기력자불생 墨子/非樂 今人與此異者也 賴其力者生 不賴基力子不生)”

“옛사람의 애인은 지금 묵자가 말한 애인이 아니다. 노예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를 부려 얻는 이익을 고려한 것일 뿐이다. 노예를 부려 얻는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노예를 사랑한 것만이 진정한 애인이다. 노예에 대한 사랑을 버려 천하가 이롭다 해도 노예를 사랑하는 것을 버릴 수 없다. (묵자/대취 석자지애인야 비금지애인야 애획지애인야 생어려획지리 비여장지이야 이애장지애인야 거기애이천하리 불능거야 墨子/大取 昔者之愛人也 非今之愛人也 愛獲之愛人也 生於慮獲之利 非勵臧之愛人也 利愛臧之愛人也 去其愛而天下利 不能去也) 
  
사대부에 갇힌 유학의 천인합일과 묵자의 민중평등성을 법고창신한 것이 바로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이다. 민중의 이익이 천명이요, 천명을 서구의 문법으로 하면 보편이성, 절대이성인데 동학은 이 천명 즉 하늘을 내 안에 모신 것이다.

절대이성의 담지자는 국가도 초월적 신도 아니다. 하늘은 사람에게만 깃든 것이 아니다. 모든 만물에 깃든 것이다. 하여 동학은 유학의 민중화로 개벽유학이다. 묵자의 평등이다. 서학의 사람과 피조물로부터의 절대적 신성인 천주를 모든 만물에 확장한 것이다.

하여 기독교의 만물의 왕인 아버지가 따로이 없는 것이다. 나와 하늘이 따로 없다. 동방에서 왕은 천명의 구현자인데 이 왕을 따로이 두지 않고 모든 사람과 만물에 모셨으니 바로 주권재민이요 생태이다. 지구 약탈적 서구 이성과 다르다. 동학은 왕의 머리를 잘랐다. 왕을 만인과 만물에 모셨다.

 

4. 이천식천(以天食天) - 날마다 하늘을 먹는 협동과 연대

해월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을 말했다. 모든 하루하루는 곧 이천식천이다. 먹고, 입고, 자고, 노는 모든 시간과 공간이 나 아닌 다른 이와 다른 것의 하늘을 먹는 역사이다. 이천식천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민주요, 평등이다. 

 

   
별명이 최보따리인 해월 최시형 신사

"사람뿐이 천주를 모셨으랴. 천지만물이 시천주가 아님이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음이 곧 이천식천이니라. 제군은 한 생물이라도 무고히 해하지 말라." - 천도교 창건사 제2편 36면-

"손님이 오거든 손님이 오셨다 이르지 말고 천주 강림하셨다." -151면-

"사람 공경함을 버리고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꽃을 따버리고 과실이 생기기를 바람과 같은 것" -36면

밥을 먹는 것은 땅, 바람, 비, 농민에 깃든 하늘을 먹는 일이다. 때문에 밥상공동체라 한다. 만물이 하늘님을 통해 같이 이어져 있다. 날마다 하늘님을 모신다. 옷을 입는 일은 길쌈하는 여인의 하늘님을 입는 것이다. 과연 천하일가이다. 동학은 유학의 신분제적 천하일가를 사람을 넘어서 모든 만물에 입체적으로 확장한다. 

시천주와 이천식천의 사유는 ‘서구의 민주를 민주화하라’, ‘서구의 혁명을 혁명하라’에 맞닿아 있다. 근대 민주주의 한계에 대해 이미 근원적으로 논파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의 문법인 주권재민이 못마땅하다. 보통은 통치권력에 대칭하여 주권재민을 쓴다. 즉 국가가 있고 민주가 있다. 그런데 동학의 시천주는 모든 만물과의 관계에서 평등과 민주를 말한다. 국가라는 통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학은 사람과 만물의 모든 관계에서 민주와 평등을 말한다. 정치가 민주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현대인의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기업의 두령을 민주주의로 뽑지는 않는다. 어찌 됐든 자본가는 노동자를 위하는 민본성도 없다. 오늘날의 주식회사 제도는 돈의 민주주의 1원 1표일 뿐이다. 국가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열망하면서도 기업의 민주주의는 시큰둥하다. 주식회사는 결코 민주주의나 민본성을 가질 수 없다.      

주권재민을 오늘날의 투표민주주의로 해석할 수 없다. 투표민주주의는 이기적 개인을 줄 세운 질서에 불과하다. 주권재민의 본뜻에 한참 모자라다. 투표율 60%에 과반수 지지면 30%의 지지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된다. 국민 그것도 성인의 30%이다. 미성년자를 포함하면 15%나 될까? 차원이 다르다.

오늘의 투표민주주의를 ‘다시개벽’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라고도 하고 ‘민주를 민주화 하라’고도 한다. 부르주아지혁명이거나 프롤레타리아혁명이거나 혁명을 다시개벽하는 즉 ‘혁명을 혁명’해야 한다. 

동학의 시천주와 이천식천은 서구의 좁은 ‘주권재민’으로 말할 수 없다. 서학의 이성, 개인의 이기적 이성을 줄 세우는 질서인 민주에 대칭하여 새로운 정명이 필요하다.

도올은 동학은 '민본성'(도올심득 동경대전1)이라고 말한다. 서학의 이성이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이성이라면, 동학의 이성은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함이다. 하여 도올의 동학을 '민본성'이라 이름한 것에 공감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무엇인가가 모자란 느낌이다. 민주, 민생, 민중의 삼민주의가 더 나은 듯하다.

아니다. 이천식천으로 서로 하늘을 나누는 대동주의(大同主義)이다. 동학의 시천주와 이천식천은 다름으로서 같음을 구하는 동이구득(同異俱得)의 대동이요, 다름으로써 서로를 보완하는 동이상보(同異相補)하는 대동이다. 다름으로서 크고 넓고 깊으며 하늘로서 하나가 된다. 약육강식의 민주가 아닌 협동하는 민주이다. 

 

5.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 - 사람과 자연이 모두 동포이고 형제이다

동학에는 기화(氣化)라는 말이 있다. 동경대전 논학문 13장에 “시자는 내유신령하고 외유기화하여 일세지인이 각지불이자야라.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하였다. 자신뿐 아니라 만물을 모시는 이는 스스로의 마음에 하늘을 모셨음이요, 이는 기화(해월은 수운의 기화를 ‘이기(理氣)의 이치가 질(質)에 응하여 몸을 형성화’하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즉 만물의 운동으로서 모두 하늘에 통한다. 하여 이 존재와 마음은 하나로서 각각 짝이 되어 따로이 옮기거나 떠날 수 없다.

즉 내안에 모신 하늘님(천도교에서는 한울님이라 한다.)이 다른 이와 만물과 서로 관계지어 운동하니 너와 나 만물은 서로 다르되 하나이다. 이때 다름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이 기화이다. 기화는 곧 협동하는 관계 작용이다. 

 

   
한글로 쓰여진 동학 경전인 <용담유사>

기화는 동질적 기화(同質的 氣化)와 이질적 기화(異質的 氣化)로 말해진다. 이를 밥을 두고 말하면 자연의 은혜로 벼가 자라 쌀이 만들어지는 것은 이질적 기화요, 농사를 짓는 사람의 일은 동질적 기화이다. 동질적 기화는 같은 종끼리의 협동이요, 이질적 기화는 다른 종들끼리의 연대이다. 하여 밥상은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는 공동체이다. 자연과 사람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서 말하는 이것이 서양의 그 어떤 철학이나 사상보다도 뛰어난 점이다. 

해월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을 말한다. 또 인오동포(人吾同胞)와 물오동포(物吾同胞)를 말한다. 이것이 시천주의 생활이다. 하늘님과 사람과 자연을 섬기라는 뜻이다. 사람과 자연이 모두 동포이고 형제이다.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서 도덕의 극치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물(物)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덕(德)에 합일(合一)될 수 있나니라. - 천도교 창건사 제2편 -

하늘님을 근대의 서구 문법인 절대이성으로 말한다면 개인이 곧 절대이성이요, 절대이성이 곧 개인인 것이다. 서구에서는 절대이성과 개인의 이성이 수직적이고 그것은 각각이다. 동학에서는 각지불이, 즉 서로 다를 수 없다. 기화를 매개로 하여 수평적이다.

서구 근대 정치학의 민주와 평등에 견줄 내용이 아니다. 이미 우주적 평등이요, 우주적 인간이요, 나가 있으되 그 나가 너와 다르지 않다. 서구의 개인적 이성의 근대 인간관과는 차원이 다른 우주적 인간관이다. 생태적 인간관이다. 개벽적 인간관이다. 굳이 근대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동학은 한국적인 근대 인간관이고 자연관이고 우주관이다.

 

6. 유무상자(有無相資) - 사람과 만물은 평등하게 서로 돕는다

이런 시천주, 이천식천은 생활 세계에서는 자치와 협동의 원리로 나타난다. 서학에서는 이성의 자유가 배제와 소외를 낳는 무한경쟁으로 나타난다. 동학에서는 공동체적 책임 내에서의 자유가 아닌 즉 자율, 자치, 자주로 나타난다.

동학의 포접은 종교 조직이기도 하지만 곧 생활의 협동 조직이기도 하였다. 국가에 의존하는 타력갱생 조직이 아니고 스스로 자력갱생하는 조직이다. 포접제의 조직은 중앙집중적인 조직이 아니라 자율과 자치로서 협동하고 연대하는 조직이었다. 평등한 조직이었다.

협동하고 연대하는 삶을 동학에서는 유무상자(有無相資)라 한다. 동학에 들면 굶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제민주화요, 공유경제요, 국가에 기대는 복지가 아닌 자치복지이다. 약육강식의 경쟁과 배제가 아니고 더불어 나누며 사는 삶이다.   

유생(儒生)이 동학을 탄압하기 위해 돌린 도남서원 통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나같이 귀천의 차등을 두지 않으니 백정과 술장사들도 오고, 엷은 천막을 치고 남녀가 뒤섞여 있으니 홀어미와 홀아비가 찾아온다. 또 재물이 있든 없든 서로 돕기를 좋아하니 가난한 이들이 기뻐했다. - 「도남서원 통문 道南書院 通文」일귀천이등위무별 즉도길자왕언 혼남녀이유박위설 즉원광자취언 호화재유무상자 즉빈궁자열언 一貴賤而等威無別 則屠洁者王焉 混男女以帷薄爲設 則怨曠者就焉 好貨財有無相資 則貧窮者悅焉 -

나라를 잃어 자결한 우국지사이되 양반과 사대부의 세계에 갇혀 동학을 적대시한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집강소의 동학농민군들은 존비와 귀천을 떠나 서로 호칭을 접장이라고 불렀다. 그런가 하면 서로 맞절을 하였다. 부녀자나 어린아이들을 부를 때도, 종과 상전, 백정과 양반, 평민과 벼슬아치를 가릴 것 없이 서로 접장이라 부르고 또 서로 맞절을 했다.” - 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 기법무귀천노소 개항례배읍 칭포군왈 포사접장 동몽왈 동몽접장 노주개입도  즉역호칭 其法無貴賤老少 皆抗禮拜揖 稱砲軍曰 砲士接長 童蒙曰 童蒙接長 奴主皆入道 則亦互稱接長 -
 
우리말에도 벗이라는 뜻의 동무가 있지만 러시아 혁명 당시에 ‘동무’(타바리쉬товарищ)는 상하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쓰이는 평등한 호칭이었다. 동학은 그보다 앞서 평등한 호칭을 썼다. / 강주영 편집위원

 

   
천도교의 시일(侍日) 장면, 교회의 예배에 해당한다. 천도교는 목사, 신부, 스님에 해당하는 성직자가 없다.

● 신동학의 꿈 - 다시개벽의 멋진 신세계 

동학의 위대함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연결하며 서로 존중하고 협동하고 연대하는 삶에 있습니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이성이 낳은 경쟁과 배제와는 다른 삶입니다.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자력갱생의 평등한 삶입니다. 협동과 연대로서 서로 모시고 공유하며 이런 마을들이 연합한 마을의 연합으로서의 국가가 동학의 정신입니다. 

국가는 작아야 하고 마을은 커야 합니다. 부국강병이 아니고 부민강민입니다. 시장은 작고 공유는 커야 합니다. 정치는 작고 자치와 자율의 삶은 커야 합니다. 자연은 약탈되지 않고 사람을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민중이 스스로 관리하는 자주관리회사, 혹은 자치관리회사가 책인은 제한적이고 이익은 무제한으로 가지는 1원1표의 주식회사를 대체해 가야 합니다. 지역공동체회사, 공동번영회사, 소유주 없는 사회적 기업이 주식회사를 대체해야 합니다. 무늬만 협동조합이고 사실상은 영리기업 주식회사인 짝퉁 협동조합이 아닌 진짜 협동조합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을 위해서 기업을 운영해야 합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민중이 국가를 대체해야 합니다. 동학의 포와 접은 생활협동조직으로 민회로 이어져야 합니다. 마을이 항상 생산하고 그로서 마을을 항상 안민하는 항산항심(恒産恒心)의 마을을 만들고 연대할 때 국가를 바로잡고 민중을 행복하게 하는 보국안민도 이루어집니다. 
 
그게 가능하느냐고요? 달걀을 낳는 닭공장이 아닌 자연에서 기른 유기농 닭의 달걀을 마트가 아닌 농민에게서 조금 더 비싸더라도 사주는 마음이면 ‘다시개벽’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런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지 않습니까?

학교급식 전문 농업협업화 단지를 만들고 교육청과 연대합시다. 노동조합은 농민과 연대하여 대형마트를 거절하고 공장의 급식과 가정의 식재료를 노농직거래로 합시다. 모든 도시계획에 도시마을 공유지와 공유건물을 만들면 가난한 이들이 해직되어도 버티고 살아낼 수 있는 방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공유지와 공유건물이 있으면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 등의 불로소득도 잡히지 않겠습니까? 

3D 출력기로 차체를 만들고 부품은 기존 자동차 회사에서 사와 만드는 초소형 공장이 가능한 시대입니다. 미국의 로컬모터스라는 회사는 작은 공장에서 3명이 첨단 수제 자동차를 만듭니다. 기술이 발전하여 이제 공장의 마을로의 귀환이 가능해졌습니다. 기술의 민중적 소유입니다. 전주에 이런 마이크로 팩토리를 이 마을, 저 마을 한 100개쯤 만들면 어떨까요?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

도시 한복판에 농원을 만드는 생각은 어떻습니까? 반농반도반공(半農半都半工)의 신개념 도시입니다. 농민이자 노동자입니다. 첨단 소공업과 농업의 결합입니다. 거대 산단을 만들겠다는 사람을 찍지 맙시다. 마을공장을 만들겠다는 사람을 찍읍시다. 학교급식을 농민과 계약 재배하겠다는, 경쟁력 있는 개인보다 협동하는 사람을 교육하는 교육감을 뽑읍시다. 군산 GM 같은 먹튀 기업 유치말고는 아무런 대안도 없는 도지사는 찍지 맙시다. 

이제 한옥마을에도 꽃이 핍니다. 다시개벽의 멋진 신세계, 신동학의 꽃이 활짝 피기를 소망합니다. / 글쓴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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