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구 전북포스트 발행인.

2015년 새해 첫날 전주 근교 고덕산에 올랐다. 고덕산은 완산칠봉의 지맥 뿌리로, 정기가 남다르다고 한다. 새해 첫 해를 품고 그 정기를 받겠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산길에 올랐다. 깜깜한 산길을 플래시에 의지한 채 올라 해가 오르기 전에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은 이미 해맞이를 위해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정상은 바람마저 강해 손끝, 발끝이 시려왔다. 새해 첫 날 추위는 유난히 매서웠다.

산 정상에서 뒤돌아보는 지난 2014년은 처절했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의 삶은 통째로 흔들렸다. 내 살 길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세상을 덮었다. 국민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라는 자탄은 현실이 됐고, 국가는 가장 기본적 기능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했다. 크고 작은 각종 사고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거기에다 국가는 국가도 아닌 꼴이 됐다. 그 사고 앞에서 국가의 안전 시스템은 밑천을 드러냈다. 아무런 조치도 찾지 못한 채 아이들을 수장시키고, 그 시간 대한민국의 ‘콘트롤 타워’는 정지됐다. 정국이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여당은 무능을 덮기에만 급급했고, 야당은 흔적도 없었다. 해가 바뀌기 직전에는 ‘십상시’ ‘문고리 권력’등 전근대적 풍자들이 난무할 만큼 대한민국은 황폐해졌다.

그래서 2015년 새해는 남다를 지도 모른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새벽에, 이 산에 올라 언 손을 비비대면서 해를 기다리고 있는가...? 달력이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바뀌었을 뿐, 오늘의 해가 어제의 해와 다를 바도 없다. 하늘엔 구름마저 가득하다. 일기예보도 일출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보했다. 그걸 감수하면서라도 산에 오를 만큼 절실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심정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가족의 건강과 화목, 평화는 기본이다. 여기에 개개인의 소소한 소망이 더해질 것이다. 올해는 공통적으로 사고 없는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기원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각오도 있을 것이다. 사업이 확 풀려 돈벼락을 맞는 꿈도 담았을 것이다. 설혹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모두가 저마다의 꿈을 쓸어 담았을 것이다.

새 해는 새로운 노트와 같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쓰던 노트라 해도 좋고, 일기장이라 해도 좋다. 우리 지나 온 삶의 노트는 항상 아쉬움으로 빼곡하다. 인간의 본성이 만족보다는 부족함에 집착하는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 지난 노트는 회한이 가득하다. 설혹 목표를 성취했다 해도 스스로 만족하기란 쉽지 않다. 남들 눈으로 멀리서 보면 얼룩이 보이지 않겠지만 모든 이의 노트는 눈물로 얼룩진다.

그래서 새로운 노트를 꺼낼 때마다 이 노트는 깨끗하게 마무리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건데, 노트는 항상 더럽혀진 상태로 뒷표지를 덮게 된다. 그걸 알면서도 새로운 기대감으로 노트를 꺼내고, 정성스럽게 이름을 쓴다. “깨끗하게 쓰고, 뿌듯함으로 가득 채워야지...”자기 암시이자, 각오이자, 염원인 것이다.

새해 해맞이는 그런 마음이다. 삶이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절실함. 내가 뜻한 바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도인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도도한 강물과 같아서, 물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간다. 억지로 바꾸기도 어렵다. 그걸 알면서도 정초 해맞이에 나서는 것은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나의 삶도 좀 나아졌으면... 내년에는 사고도 없고, 보다 안전하고, 정치도 국민 편에서 잘 좀 흘러갔으면... 하는 절실함인 것이다.

새해 첫 해가 어제의 해와 다를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해맞이를 통해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진다. 내가 달라지면 내가 보는 해도 달라지는 것이다. 새 노트를 꺼내는 설렘과 기대. 새로운 출발에 대한 다짐. 이마저도 없으면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하지 않겠는가...?

*이 기사는 전주일보에 게재되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