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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전주를 사색하다 - 동학혁명기념관에서 신동학을 생각한다 -1<신년기획>전라도 정도(定都) 천년...'동방의 등불'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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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3  11: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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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거리를 동쪽으로 올라와 오른쪽으로 돈다. 한옥마을의 은행로 북쪽이다. 한옥마을의 경기전에서 오목대 밑에 이르는 길이 태조로, 북쪽 동부시장서 남쪽 전주천 청연루에 이르는 길이 은행로이다. 은행로 북쪽에 고려 우왕 9년(1383년)에 월당 최담 선생이 심은 6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그래서 ‘은행로’라 한다. 

600여 년 세월에도 나무 밑둥에서 2005년부터 새끼 은행나무가 새로 자랐다. 고목에서 새싹이 자랐다. 옛 정신의 뿌리로부터 새로운 정신이 자란다. 상서롭다. 과연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다시 개화(開化)가 아니고 다시 개벽(開闢)이다.

 

   
600여 년된 고목 은행나무에서 2005년부터 새로이 은행나무가 자란다. 과연 법고창신이다. 고목 완쪽에 가느다랗게 뻗은 줄기가 새 은행나무이다.

혹자는 개화파의 좌측이 민주주의이고 우측이 산업화라고 한다. 2018년 병통의 근대를 개벽하는 생각을 해본다. 개벽은 알다시피 동학에서 나왔다. 개화파가 있었고 개벽파가 있었다. 개벽파는 지금의 근대가 아닌 또 다른 천하를 기획했다고 생각해본다. 개화파의 근대를 ‘개화근대’라 한다면 개벽파의 시대를 ‘개벽근대’라 할 만하나 그 말을 쓰지 않는다.  ‘개벽천하’라 한다.     

    

은행나무 앞에 동학혁명기념관이 있다. 건물의 둘레 벽에 동학혁명의 주요 지도자들인 손화중, 김개남, 전봉준, 김덕명 등의 인물화가 붙어 있다. 1995년에 지어졌다. 아직 바람이  쌀쌀하다. 동방에 봄은 왔으나 봄은 일러서 새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세기(世紀)를 앞질러 때 이르게 핀 꽃이 있었다. 동학이다. (이 글에서는 서학과 대칭한 새로운 사상운동으로서는 ‘동학’, 1894년의 민중 봉기를 ‘동학혁명’, 종교로서의 동학은 손병희 성사가 이름을 지은 ‘천도교’라 한다.)

동학은 때 이른 시대의 봄을 찾아 피었다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한때 꺾였으나 600여 년 된 은행나무에 새나무가 자라 듯이 신동학을 생각한다. 신동학을  ‘다시 개벽천하’라 이름해 본다. 

 

 1) 진보의 해체를 생각한다

신동학을 생각하니 ‘진보’가 떠오른다. 스스로 진보를 자처했고,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상식적 정의도 진보요, 민주주의도, 평등도 진보이다. 진보 공동체로서 사회주의를 생각했다. 그 사상으로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품었다.

오랜 방황 끝에 아름다운 뜻만은 지키되 사회 실천 전략으로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버렸다. ‘사회주의’를 말할 때는 개인주의 원리로 작동되는 자본주의에 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이런 뜻에서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이다.   

이 여정에서 ‘진보’를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근대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근대를 동방의 표현으로 하면 춘추전국시대였다. 전쟁이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천하대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이전보다도 발전된 사회라는 생각이 뿌리 깊다. 과연 그런가 의심해본다. 의심하되 쉽사리 ‘진보’라는 개념을 버리지 못한다.

진보의 해체는 아직은 의심의 차원이다. ‘근대 = 이전보다도 진보한 사회’라는 도식이 우리 생각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과연 그런가? 진보를 쉽사리 해체하지 못하는 생각의 밑바닥에는 진보를 해체하면 역사가 어디로 가나 하는 공포가 있다. 출구의 불안이다.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이라는 점에서 진보는 여전히 필요한 개념이다. 진보는 희망을 준다. 그렇다면 ‘더 좋은 내일’은 ‘옮음’인가? 그 옳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더 좋은 내일’이 ‘어제보다도 편리하다는 의미에서의 ‘발전’인가? 어제보다도 더 쓸모가 있다는 차원에서의 ‘개발’인가? 어제보다도 더 ‘공정’한 내일인가? 도대체 진보의 실체는 무엇인가? 

19세기에 발화한 조선의 동학이 위대했던 것은 1894년의 동학혁명 때문만이 아니다. 동학이 위대한 것은 그 이전 시대의 문명과 사상의 원리를 새로이 갈아엎은 ‘개벽성’이다. 그 ‘개벽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개벽성의 천하를 서구적 문법인 근대에 대칭하여 필자는 ‘실현되지 않은 근대’ 아니 '실현되지 않은 개벽천하’라 부르고 싶다.

 

   
동학혁명기념관이다. 기념관 창에 동학혁명의 주요 지도자들의 인물화가 붙어 있다.

2) 근대 = 진보인가?

근대라는 개념은 이전 시대를 중세, 고대로 나눈다. 그리고 중세는 고대보다도 진보한 것이고, 근대는 중세보다도 진보한 것이라 당연히 생각한다. 이것이 일직선적인 시간 관념이다. 현재에 가까운 시간은 과거보다도 아름답다는 사관이 진보사관이다.

힘이 주어진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다. 뉴턴 역학 관성의 법칙이다. 그 힘의 크기는 질량과 가속도의 곱에 비례한다. 이런 운동관은 현대물리학의 여러 법칙에 의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게 증명되었다. 대표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있다.

힘이 주어진 방향으로만 물체가 운동하는 게 아니다. 운동과 시간의 일직선 사고는 다른 방식으로도 말해진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생물학 다윈사관이 있다. 부국강병론이고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로 간다.

살아남은 게 문명이고 약한 것은 야만이다. 마르크스의 고전고대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제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사적유물론이 있다. 단선적인 목적론적인 사관이다. 형이상학에서는 헤겔류의 절대이성의 궤적 등이 진보사관의 요체이다. 

‘근대’라는 개념에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위의 사관을 마음에 가졌다. 이런 사관에 동의하지 않기에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단절적인 시간들은 과거를 ‘옛’이 아닌 ‘낡음’으로 치부하기 쉽다.

목적론적인 사관은 민중을 특정한 방향의 합목적성으로 즉 과학적 사회주의혁명으로 동원한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좌파나 자본주의적 우파나 동전의 서로 다른 양면이다. 

러시아의 크로포트킨(1842~1921)은 다윈류의 약육강식 진보관에 대칭하여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호부조를 말하였다. 벌이 꽃가루를 날라 수분작용을 일으켜 꽃이 핀다. 중세 시대에도 공유지는 상호부조의 원리로 유지되었고 길드는 서로 협동하였다. 크로포트킨은 세계와 역사는 약육강식의 원리만 작동한 것이 아니라고 논파하였다. 시간과 공간이 쌓여 이루는 역사는 유기체적인 생명이고 단순계가 아니고 복합계이다. 

 

   
전주 한옥마을 은행로 풍경, 아직 꽃은 피지 않았다.

혜강 최한기(1803~1877)는 기(氣)의 활동운화(活動運化)라 하였다. 천하는 한 덩어리의 살아 있는 것 즉 일단활물(一團活物)이다. ‘기’는 천하 유기체론의 핵심어였다.  ‘기’는 숨소리이다. 숨소리는 생명체가 살아있음이요. 식물은 광합성이요. 들의 안개는 들의 숨소리, 타 버린 재와 돌과 흙에도 생명의 기운이 정(靜)의 형태로 있다고 보았다.

시간과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활동운화함으로서 기의 형상이 변하니 시간이 있음을 알겠고, 형상이 보이는 곳이 있으니 공간이 있다. 시간과 공간도 서로 유기체이다.    

3) 개벽천하

세계라고 하지 않고 천하라 하였다. 세계는 지리학의 공간이다. 천하는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말처럼 지문학의 공간이다. 천지인(天地人)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천인합일의 시간과 공간이다.

서학에서는 하늘이 인간과 분리되어 초월적인 곳에 따로 있다. 수직적 사유이다. 동학에서는 하늘이 모두에게 있다. 바로 시천주(侍天主)이다.  수평적 사유이다. 세계 사람이나 만물과 동떨어져 있는 초월적 절대 인격이 아니다. 

개벽은 말 그대로 천하가 새로이 열린다는 뜻이다. 새로이 열리되 단절된 시공간이 아니다. 천하는 운동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어제와 오늘이 융복합하여 내일을 만든다. 내일은 어제와 오늘의 유기적 시간에 존재한다. 어제의 시간이 싹으로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꽃을 피운다. 어제의 시간과 공간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다른 그 무엇으로 일어난다. 이른바 양질전화이다. 달걀이 어느 날 부화의 누적된 시간의 양 속에서 병아리로 날개짓을 한다. 

새벽이라 꽃이 피나, 꽃이 피니 새벽이요, 석양이라 꽃이 지나, 꽃이 지니 석양이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개벽의 좌절을 시인 신동엽은 이렇게 썼다. “잠깐 빛났던 / 당신의 얼굴은 / 永遠의 하늘, / 끝나지 않는 / 우리들의 깊은 / 가슴이었다.”-「금강」-     
 
아래에서는 근대적 사유 = 진보적 사유로 보고 그 논리를 들어가 본다. 
  
 4) 반봉건이 근대라면 아시아에서 근대는 이미 진시황때에 만들어졌다. 
 
동학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반봉건 사상이 아니다. 개벽이 반드시 반봉건인 것은 아니다. 신분제의 타파를 넘어서 빈부상하, 남녀노소를 모두 하늘님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를 반봉건이라 할려면 조선에 봉건제가 있어야 한다.

조선을 봉건제라 함은 서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봉건제는 쌍무계약 관계이다. 지지와 충성의 대가로 보호와 보상이 있다. 민(民)은 영주 또는 토호에게 지지와 충성을 준다. 그 대가로 봉토의 경작과 공동체의 안녕을 보호 받는다. 영주 또는 토호는 왕에게 충성하고 민의 지배권과 봉토를 받는다.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

조선은 이미 과거제로서 실력주의를 도입했고 팔도와 지방수령을 중앙에서 파견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봉건제가 없었다. 서구에서 봉건제가 타파되고 오늘날의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648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진시황 때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서 군현제를 실시했다. 한나라에 이르러 다시 봉건제로 되돌아갔으나 이후에 다시 군현제로 왔다.

최근에는 신분제적 억압을 제외한 ‘탈 신분제적 봉건원리’를 유기적 천하의 원리로 복원하자는 논의도 있다. 강력한 지방분권의 연방제는 사실상 ‘탈신분제적 봉건원리’와 흡사한 점이 많다. 이런 차원에서 봉건제를 연구할만 하다.    

5) 신분제 타파가 근대인가? 

그렇다 할 것이다. 신분제 타파가 근대라면 오늘날에도 근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분제는 여전히 작동한다. 금수저, 흙수저가 있다. 다만 계약관계로 포장되었을 뿐이다. 젠더 신분제는 미투운동에서처럼 여전히 작동한다. 인종차별과 문명차별은 여전하다.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은 1928년에, 미국에서의 흑인참정권은 사실상 1966년에서야 부여되었다. 일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보통선거권이라는 의미에서는 아예 참정권이 없다. 독재국가라고는 해도 근대국가가 아니라고는 안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신시대에는 참정권이 제한되는 통일주체국회의원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도 1987년에서야 실시되었다. 갑질은 인격도야가 덜된 일부 그릇된 이들의 행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신분제적 습성이다. 신분제와 그 잔존 문화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     

6) 신성국가에서 세속국가가 근대화인가?

가톨릭의 교리가 유럽을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이 사실상 붕괴된 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이다. 이때서야 유럽에서 신성국가가 아닌 세속 국민국가가 출현한다. 이를 근대라고 한다면 중국과 한국은 신성국가였던 적이 없다. 불교나 유교가 철학과 사상으로 작동했을지언정 이를 신성국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슬람의 이란이 1979년에 이슬람국가로의 혁명은 근대를 거스르는 반동인가? 케말파샤의 세속 근대국가 터키가 에르도안 정권에 와서 다시 재이슬람화 하는 것은 반동인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공산주의가 사라진 러시아에서는 다시 러시아정교회가 강력히 부활하고 있다. 

사실 이슬람과 러시아 정교회는 교리적 원리보다는 문명적 원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아니고 유학이라 하는 것처럼 이슬람교가 아니라 이슬람 문명이다. 

교조의 독단성을 반대할 일이다. 가톨릭 교황청의 독단을, 이슬람 율법학자 울리마의 독단을 반대할 일이다. 영성의 교조화를 거부하는 것이지 영성정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영성이 반드시 그 어떤 초월적 신인 것도 아니다. 동방에서는 영성정치를 ‘덕치’ 또는 ‘예치’라 불렀다.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된 개벽잡지.

7) 근대는 법치인가, 그럼 덕치 또는 예치는 버려야 하는가? 

예(禮)는 윤리규범을 말한다. 예는 풍속이 되기도 한다. 예의 본질은 서로 돌보고 모심에 있다. 동학의 시천주가 그것이다. 고여 썩은 예는 기득권이 되고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다. 이는 어떤 사상이나 제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경(詩經)에는 ‘사람이면서 예가 없다니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는가(人而無禮胡不遄死)’ 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인(仁)에서 비롯되는 예치주의(禮治)를 발전시켜 덕치(德治)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덕치사상은 치자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심성이 착하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데 순자(荀子)의 성악설은 이와 대비된다. 한편 순자는 예의 교육을 통해 사람은 악한 본성을 고치고 덕과 인을 얻게 된다고 생각했다. 후천도야의 인권이다.

순자는 덕치를 곧 예치, 즉 예라는 사회제도를 통해 나라와 백성을 통치한다고 보았다. 한비자의 법치는 순자의 성악설을 이어받았다. 잘 알다시피 기독교는 원죄를 말한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성악설이다. 

덕치와 법치를 쉽게 말하면 이렇다.

자식이 죄를 지으면 엄정한 법치는 부모라도 자식을 법에 넘겨야 한다. 덕치는 자식을 들쳐업고 도망간다. 형법에도 친족은 불고지죄가 없다. 덕치와 법치 어느 게 옳다고는 못하겠다. 오늘날은 덕치가 없어서 문제이지 법치가 없어서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물론 삼성 이재용처럼 무전유죄유전무죄도 없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늘날의 법치가 대부분은 ‘사적소유권’, ‘개인의 보호’, ‘계약 우선’이라는 원리의 작동이 더 커서 문제이다. 필연적으로 불공정과 불평등을 낳는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고 하나 법 자체가 만인에 평등하지 않다. 법은 서로 다른 천하의 휴전 상태이다.       

   
동학혁명기념관 전시실.

8) 근대는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인가 ? 그렇다면 고려는 이미 근대국가이다. 

유럽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에 신성국가에서 세속국가로 넘어오면서 국가의 경계를 획정하기 위한 개념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른바 민족이다. 하여 혹자는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es,’ (베네딕트 앤더슨), 또는 ‘전통의 발명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릭 홉스봄,  테렌스 레인저)로 민족이 고안되었다.

이 땅을 저 가문이, 저 땅을 이 가문이 다스리던 유럽 봉건제에서는 민족이 발명되었을 법 하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실존체였다. 글자로 보면 이미 세종대에 민족국가가 만들어졌다. 한자를 사용해도 이미 고구려 시대부터 중원과는 다른 문화와 풍습과 말을 가졌다.
 
다만 민족국가를 폐쇄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국가를 넘은 천하를 유기적으로 생각할 일이다. 유기체에서 경계는 살아 움직인다. 나라의 경계를 배타적으로 생각할 일도 아니다.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동쪽이 스스로 러시아에 합병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 의해 60여개로 쪼개졌다. 지금 이슬람에서 다시 오스만 제국의 부활이 외쳐진다. 유고슬라비아연방도 쪼개졌다. 쪼개지면서 서로 인종 청소와 타 종교 배타가 이루어졌다. 지금 다시 신유고주의가 외쳐진다. 하나였던 조선도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질 것이다.    

9) 개인, 자유, 천부인권, 민주, 평등, 이성이 근대이다. 그럼 이것들은 이전보다도 진보한 것인가?

개인이란 것이 실존체로서는 분명히 있다. 그 개인은 단독자이다. 그럼으로 사회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불가침의 천부인권을 가졌다. 그 천부인권을 가졌기에 그는 어떤 차별도 받아서는 안된다. 평등해야 한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뽑을 수 있다.  평등한 단독자 개인은 참을 구별해내는 이성을 즉 거짓으로부터 참을 구별해내는 이성을 가졌기에 역사를 진보시킬 수 있다. 이 역사를 근대라 한다. 

과연 그런가? 이렇게 바꾼다 

개인은 약육강식의 경쟁시장에 줄을 설 자유가 있다. 부자가 될 자유도 있지만 99%는 노동자가 된다. 노동력을 내다 팔 자유만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권력자와 평민은 절대로 평등하지가 않다. 자유로운 자영업을  꿈꾸지만 빚더미에 얹히기 십상이다. 공동체는 자유의 대가로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동학혁명기념관 전시실.

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자유가 아닌 공동체 속에서의 자율을 선택한다. 공동체는 문화와 풍속 그리고 제도로서 나의 실질적 평등을 보장한다. 경쟁의 원리가 아닌 협동의 상호부조가 사회의 구성원리가 된다. 욕망자 개인을 줄세우는 질서에 불과한 민주보다는 민본을 세워서 민주를 운영한다. 민본 없는 민주는 평등을 세울 수 없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선하든 악하든 천부적으로 인권은 주어지지만 사회적 자기도야 없는 인권은 욕망격이다. 감성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 참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옳기도 하지만 좋기도 해야 한다. 사랑을 이성으로 하는가? 감성으로 한다.         

하여 다시 개벽이다. 개인에 사회를, 자유에 자율을, 천부인권에 사회적 인권을, 민주에 민본을, 이성에 감성을 대칭한다.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서 평등에 대동을 대칭한다.  

사족을 단다.

조선의 사색당파는 오늘날로 보면 다당제이다. 경국대전은 헌법이었다. 정도전의 계민수전(計民受田,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줌)과 신권의 강화는 오늘날로 보면 입헌군주제에 가깝다. 사관이 2명 이상이 반드시 있어야만 공무를 볼 수 있었다. 덕치를 쌓기 위해 매일 경연장에 가야 했고, 빗발치는 상소를 읽고 비답을 내려야 했다.

 

   
방정환 선생이 발간한 잡지 어린이(얼을 가진 이)

그러고도 사헌부와 사간원의 견제를 받았다. 드라마에서 ‘통촉하소서’가 그것이다.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어떤 나라의 말세의 풍경을 그 시대 전체의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상과 제도이든 고이면 썩는다. 끊임없이 경장해야 한다.  

동학혁명기념관 앞에서 신동학의 꽃이 피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님의 침묵’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다른 백년으로 가기를 열망한다. 600여년 고목 은행나무에서 새로 자란 은행나무가 ‘다른 백년’의 열매를 열기를 고대하고 고대한다.  (계속-동학의구체적인 개벽성) 
 

   
글쓴이 강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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