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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전주를 사색하다 - 동문거리에서 마을의 재구성을 생각한다.<신년기획>전라도 정도(定都) 천년...'동방의 등불'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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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08  15: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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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 옛터에서 국가 통치 기구 ‘감영’과 동학혁명 기구 ‘집강소’의 충돌과 공존을 통해 국가와 민중의 새로운 관민상화를 꿈꾸었다. 다시 팔달로를 건너 동문거리로 간다.

지금의 산업은행을 지난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옛 전주 부영(府營)자리에 ‘조선식산은행’을 세운 곳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박배엽(1957~2004)이 통째로 사서 문화공간을 만들자던 건물이라고 이 지역 문인 신귀백 선생은 '전주편애-133쪽'에서 회고한다. 

 

   
그늘이 내려앉는 전주 동문거리(서에서 동쪽으로 찍음)

시인 박배엽이 떠오른다. 그의 마지막 날 서곡마을의 병상을 찾아갔다. “일찍 가는 것은 억울치 않으나 좋은 날을 못 보고 간다.”고 하였다. 그 며칠 후 그는 고인이 되었다. 그와의 여러 사연이 많으나 유월항쟁 때의 일을 더듬어 그를 추모한다. 

지금은 지리산 자락에 머무는 시인 박남준과 박배엽이 1987년 유월항쟁 때 선전물 제작을 책임졌다. 막 감옥에서 출소한 필자가 실무진으로 참가했다. 전주의 주산으로 말해지는 기린봉 자락의 허름한 기와집 행랑채였다.

이 지역 문화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최순희, 김상배 부부가 살고 있었다. 행랑채에 있는 두 선배 부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거리에 나가 있었을 것이다. 키가 큰 배엽 형이 천정 낮은 행랑채 방을 구부리고 들어선다. 소년 같은 미소를 지은 남준이 형이 따라 들어온다. 투쟁 방침과 시위 현장의 소식을 몽땅 풀어놓고 나간다.

“ 아, 나 좀 데려가요. 나만 방구석에 처박고... 좀이 쑤셔 죽겄네.”
“선전물 쓰는 게 네 일이여. 우물에 막걸리 담가 놓았다. 목 마르면 마셔라.”

아마도 비밀 인쇄소를 갔을 것이다. 시위 현장의 주된 거리 이름이 팔달로였다. 투쟁소식지 이름을 민주화가 사통팔달하라는 의미로 ‘팔달로’라 하자고 제안했다. 두 시인 형들이 좋다고 하였다. 계엄령이 내려지네 어쩌네 하던 말들이 돌고 있었다.

이미 노출된 투쟁본부 지휘부야 체포되더라도 투쟁역량을 유지하기 위한 배려로 필자를 못나가게 했을 것이다. 금방 출소했는데 또 보내기도 그렇지 않은가?

형들의 말을 어기고 유인물을 다 쓰면 팔달로에 나갔다. 코아백화점 건물에서 팔달로로 아이스크림, 응원의 종이비행기, 천원짜리 지폐가 벚꽃처럼 날렸다. 그렇게 우리는 대동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전주 최초의 철근콘리트건물인 박다옥(1919)의 현재 모습.

전주에서 동문거리는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린다. 화구점, 구식 인쇄소, 서점, 헌책방, 표구점, 남한에서 제일 오래 됐다는 삼양다방, 선술집, 카페, 소극장, 갤러리, 가맥집이 지금도 영업 중이다. 그러나 옛 모습은 사라지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글만 보고 찾아왔다가는 실망하기 쉽다. 오래된 근대의 풍경을, 그 향기를 기억하는 이들만이 동문거리의 쇠락을 걱정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이 거리에는 장년의 문인, 화가, 소리꾼, 통기타 가수, 장고잽이, 대금 연주자, 피아니스트, 기자들이 출입한다.

운 좋은 날이면 카페에서 이들의 난장을 공짜로 즐길 수 있다. 도대체 잰 체 하지 않는다. 예술을 한다고 폼을 잡지 않는다. 흥이 나면 놀 뿐이다. 그런데 인심이 참 야박하다. 그 좋은 난장 공연을 봤으면 맥주 몇 병이라도 놓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들 간다.       

이른바 근대건축물로 옛 모습을 가진 건물이 동문거리에 몇 개 있다. 일제 경찰서장 관사인 지금의 ‘경성 게스트 하우스’, 지금은 절집인 선각사로 사용 중인 ‘전북금융조합연합회’ 건물이 있다. 금융조합 건물은 1929년에 건축업자 아베라는 일본인이 건축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곳에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이 산재한다. 적 일본의 재산이라 해서 적산건물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선각사 일제강점기 1929년에 건축된 금융조합 건물.

전주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은 ‘박다옥’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웨딩거리, 서문거리에 위치한다. 동문거리의 반대편이다. 등기는 1929년이지만 1919년에 지어졌다는 말이 있다. 동문거리와 서문거리(웨딩거리)는 일제시대에는 대정정(大正町)으로 불리웠다. 현 차이나거리에서 독립영화관으로 통하는 길이 본정정(本正頂)이다. 

서문에서는 현제명이 노래를 했고, 웨딩거리에서는 이응로 화백이 그림을 그렸고, 동문에서는 문인들이 글을 썼다. 그 사연들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신귀백이 쓴 「전주편애」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한 대목만 옮긴다.

“동문거리는 서점들 말고도 별 하나에 어린 추억을 말하는 시처럼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수 많은 이름들이 있다. 단어들이 합하여 문장을 이루듯 70년대를 전후로 생겨난 헌책방, 막걸릿집, 다방들이 동문거리를 이루었다. 가락국수와 단무지가 맛 있던 아리랑제과점, 두툼한 호떡을 팔던 장미호떡, 막걸리의 대명사 후문집, 백반을 팔던 한성식당과 경원집, 거시기 때문에 마이신을 사먹는 청년들이 많이 드나들던 조약국, 짬뽕국물이 끝내주던 동명각, 그리고 배고픈 연극배우들의 창작소극장 등 별은 셀 수 없이 많다. 80년대에 시청과 도청, 법원과 방송국이 나가면서 이곳 동문거리는 시절을 잃게 된다.” -신귀백, 김경미「전주편애」206쪽- 

동문거리의 풍경은 추억으로 불리는 전통과 ‘전통의 발명’(The Invention of Tradition 에릭 홉스봄, 테렌스 레인저)인 근대의 서사가 뒤엉켜 있다. 전통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근대는 새로운 것으로 말해진다.

근대는 분명 내 나라에서 고금의 단절을 통해 서구에서 이식된 ‘발명’이었다. 80년대에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전통적인 공통체성은 2018년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전통성이 현재의 공간에서 발현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제일 오래 남아 있는 동문 거리의 삼양다방. / 신귀백, 김경미 지음 <전주편애>에서 재촬영.

동문거리에는 원주민 또는 이주해온 문화 예술가들이 추방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잦다. 공동체성이 사라진 계약의 세계이다. 법치(法治)이다. 법치가 근대라면 전통은 예치(禮治)이다.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식이 부모를 들쳐업고 야밤에 줄행랑을 치는 게 예치이다. 법에도 그 흔적이 남아 친족의 경우 죄를 지은 자를 숨겨도 ‘불고지 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엄정한 법치라면 부모라도 벌주어야 한다. ‘예치’가 ‘좋음’이라면 법치는 ‘옳음’인가? 정의(正義)는 무엇일까? 그 경계를 말하기 어렵다. 실컷 마을을 활성화시켰더니 계약을 들어 나가라 한다. 예치의 전통에 산다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연구에 의하면 옛 전통에서 지주라도 소작권은 강탈할 수 없었다. 소작권은 점유권으로 소유권에 앞섰다. 생사여탈권은 일하는 두레에 있지 지주에게 있지 않았다. 말세의 풍경을 평셍에 적용하여 일반화할 수 없다. 관습화된 사회계약인 셈이다. 아니다. 계약이라기보다는 풍습이고 문명이다.

토지조사 같은 일제에 의한 사적소유권의 강화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분할 통치에 유리했다. 점유권이 소유권의 밑으로 전락했다. 농업문명사회 유지의 가장 큰 원리가 역전되었다. 지주는 가만히 앉아서 사적소유권의 이익을 받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친일파가 되었다. 이른바 소극적 친일파이다.  

동문거리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의 금융조합연합회 건물에서 예치에 의한 점유의 전통을 파괴하고 법치에 의한 사적소유권의 근대를 발명하여 이식시켰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찰서장 관사였던 지금의 경성게스트하우스.

관습의 유지가 풍습이다. 동문거리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생각하면 전통이 더 아름답다. 진보가 내일에 있는 게 아니라 어제에 있다. 더 오래된 전통 토지공유제까지야 가지 못하더라도... 그러니 점유권의 현대화야말로 고금합작이다. 

점유가 소유에 앞선다는 생각은 지켜야하는 전통이다. 토지에 아무런 노동도 가하지 않았는데 토지주가 토지의 이득을 전유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토지에 노동을 보탠 이는 점유한 농민 또는 노동자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지대라 한다. 지대는 부동산 임대료를 포함한다. 

토지주나 건물주의 노력이 있다고는 할 수 있다. 그가 노력해서 명소가 되었다고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이다. 도시의 토지 지대 수취는 대개가 도시계획에 의한 세금의 집행과 개발로 인한 것이다. 토지주는 등기권리증만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개발 이익 환수제가 있다. 25%정도이다.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는 최고 50%까지이고 2006년 도입되었다. 양도세도 있다. 이것은 다 이익 향유자측에서 환수하는 것이다.

사적소유권은 그대로 있고 점유권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말하고 싶은대로 하자면 우리 사회의 평균이윤율이 15%정도이니 85%까지 환수해야 한다. 평균이윤율을 초과하는 이익의 100%를 환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잘 되는 원룸의 수익률이 연 10~15%정도이다. 그것도 은행이자와 비교하면 대단한 수익이다. 대박집 아니고서야 통닭집이나 호프집, 작은 서점에서는 원가도 못 건진다. 자기 노임을 원가로 봐야 한다. 자기 노임이라도 건지면 이윤율이 딱 0%이다.

점유권 보호법으로는 오늘날에는 상가임대차보호법, 공정거래법, 전월세임대차법, 논농사직불제 같은 것이 있다. 그런데 한발 더 나가자는 것이다. 도시의 가난한 자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지를 만들자는 것이다. 도로와 같다. 민자유료도로가 있기는 하다. 국도로 돌아가면 된다. 도로는 진입을 제한하지 않는다. 즉 경쟁하지 않는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공유지 또는 공공재는 배제와 경쟁이 없다.

 

   
왼편이 박다옥 건물이다. 당시에는 대정거리이다. / 신귀백, 김경미 지음 <전주편애>에서 재촬영

한정된 공유지의 쟁탈과 무임승차를 방지할 필요가 있다. 공유지 운영은 마을주민이 한다. - 마을 공유지 운영위원회라 부른다. 관청에서 하는 것을 반대한다. 지방자치법의 주민자치위원회가 하는 것도 반대다. 마을주민 중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한다. 재판의 국민배심제 같은 것이다. 추첨제 민주주의이다. 여기에 마을 밖의 존경의 권위자를 더할 수는 있겠다.

운영의 근본 원리는 조례로 정한다. 공유지 입주자 선정은 공익성 평가를 한다. 공익성 평가를 위한 기준까지는 조례 밑의 규칙으로 하여 자치입법화 한다. 

무임승차방지를 위해 입주자는 마을에 공헌해야 한다. 소득을 공개하고 소득의 몇 %를 마을복지에 쓴다. 소득은 구간별로 획정한다. 독립할 기반을 쌓으면 나가야 한다. 소득의 마을 환수 외에도 다른 방식이 있다. 입주자의 재능기부이다. 음식점은 독거노인 식사 제공, 미용실은 저소득자 무료 미용, 작가는 마을 주민 저서전 쓰기 무료 지도, 화가는 마을공공미술 제공 등이 있다. 

공유지 유지관리비 외에는 임대료는 0%이다. 마을 공유지 사례는 많다. 임실, 부안, 무주 등의 재래시장이 그것이다. 전후의 후생주택, 장옥이라 불렸다. 지자체가 아주 저렴하게 임대해준다. 점유권 인정이 쎄다. 상인과 지자체의 인식이 모자라 시장기능 이외에는 다른 기능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동문거리를 걸으면서 전통의 현대적 복원을 생각한다. 마을 공유지 확보는 전통의 예치이며 오래된 진보이다. 하여 어제는 없이 앞만 보는 직선적 진보보다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아니 전통주의자가 된다.  

여기서 나는 마을을 재구성하는 원리의 씨앗을 생각한다. 전통에서 오래된 미래를 발명하지 않고 발견한다. 서구에서 이식된 현대 마을의 원리 커피와 베이글의 식사인지, 정갈한 9첩 반상인지? 제대로 된 동서고금합작의 비빔밥을 만든다면 그 또한 '발명된 전통'이 될지 모르겠다.

동문예술거리에서 잠시 예술을 생각한다. 생각하는 자는 생각으로 실천한다. 무엇인가 만드는 실천은 담론을 통해서 앞으로 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담론과 실천의 경직성을 열어주는 상상력이다. 예술은 실천과 생각으로 목마른 이에게 물을 콸콸 뿜어주는 상상의 마중물이다. 그래서 그들의 일탈과 자유로움이 존중된다. 술에 처박혀도 그 무엇인가가 심장이나 머리에서 구를테니......동문예술거리가 이런 의미에서 삐딱함을 너그러이 품었으면 좋겠다. 

 

   
필자인 강주영 편집위원

‘시간은 직선이다.’라는 진보사관이 다른 생각 다른 백년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옥의 선이 가지는 곡선의 유려함과 완만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진보는 전통과 단절되고 전통은 고루한 것이 되고 말았다. 뉴턴의 시간관에 충실한 진보사관이 자본주의에서나 역사상의 사회주의에서나 유기적이고 중층적인 시간, 유기적 천하체계를 숙청했다. 

동문거리에서 전통의 복원과 마을의 재구성을 생각한다. 은행로로 들어가 한옥마을 속으로 간다. / 강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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