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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산비야 호남평야 끝자락... 김제 백산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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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6  15: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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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게 펼쳐진 백산들녘.
   
겨울들녘 310*900 한지에 색채. / 소래 박홍규 작

김제 백산면 주변의 지평선 길을 걸었다. 시누대, 사철나무 울타리, 날으는 까치떼, 덤불 속의 까투리와 장끼, 백산 저수지의 흰 고니떼들.....유년의 고향으로 50여 년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들녘 저쪽 끝 소실점을 따라 동구를 나선 이는 고향에 오지 않았다. 쑥을 캐던 희는 소실점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해설핀 신작로가에 코스모스가 몇십 번을 피고 졌다. 검은 머리 흰머리로 날려도 소실점으로 사라진 사내들은 오지 않았다. 그 사내를 찾아 나선 희도 돌아오지 않았다. 반나마 기운 빈집에는 거미가 줄을 쳤다.

얼마 전에 전녹두 빈 옛집에서 썼다.

<빈집의 꿈 >

들숨에도 날숨에도
구절초 꽃잎만 구릅디다
그 사내 늙어서도 지지 않더이다
막걸리에 꽃잎으로 핍디다
구르는 꽃잎마다
서리가 내리는데
조선낫 같은 초승달 뜬 밤
가마니를 헐어
대숲 비둘기에 뿌리고는 
동구를 나선
봉준이는 돌아오지 않습디다
무청 시래기처럼
말라 부서지는 빈집 
바람벽에 가을볕이 둥둥 뜨고
검기운 빈집 뜨락에
끝불타는 단풍이 한 잎 두 잎
배들평 들녘 소실점에 까마귀 떼
멀리 하나, 둘… 열 
가까이 백, 이백, 삼백
바람으로 몰려옵디다
바람 한 뜸마다 
구절초 꽃은 피는데
고부 조소리 전녹두 옛집
빈집에는 흩어진 꿈만 구릅디다

환청이 인다. 가난했지만 빛나던 시절이었다. 이웃과 벗들이 있었다. 컴퓨터와 놀지 않고 자연과 놀았다. 어두워진 들녘에 어머니들이 자식을 불렀다. 그 모성의 소리를 환청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어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겨울햇살이 내린 빛나는 고향, 도시를 벗어난 행복을 준다. / 사진 김향숙

그 목소리는 공장에서도, 쫒기던 골목에서도, 최루탄이 가득하던 교정에서도, 0.7평의 옥사 독방에서도, 사랑으로 걷잡을 수 없던 시절에도 나를 불렀다. 오래된 미래이고 사람의 소리였다. 돈과 계약의 세계가 아니다. 민촌의 관습과 규범이 자연스러운 유대를 형성하는 사람의 세계였다. 잃어버린 낙원의 세계가 지평선길에서 나를 붙든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진보라지만 때로는 어제가 진보이다.

그 목소리가 그리운 어느날 몽땅 취했다. 그날 메모는 이렇게 적혔다.

"전라도 가시내야, 니 숨 죽여 우는 곳이 타관의 낡은 여인숙이더냐? 어쩌자고 고향을 버리고 바람 부는 타관으로 숨어들었더냐? 햇볕에 기어나와 목 놓아 울어라, 전라도 가시내야. 적산가옥의 삐걱거리는 계단참에서 빛이 가둬지도록 사내는 앉아 있었다. 그리워서 녹난 눈물이 흘렀다."

북방의 이용악 시 <전라도 가시내>를 떠올렸다.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 손때 수집은 분홍댕기 휘 휘 날리며 /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그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빛나는 고향에 온 것이다.

탱자나무울타리에 쪼그려 앉은 소년이 있었다. 손등은 트고 입술은 파랗다. 나일론 독고리는 바람을 못 막았다. 어떤 것으로 썰매를 지치는 막대를 할까? 연자새로는 맞춤인데. 내 목수 기질은 유년에 이루어졌을까?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니 작은 교회가 보인다. 겨울 햇살이 내린 교회는 작은 것이 주는 소박함과 경건함을 자아낸다. 도시를 벗어난 행복을 준다.

마을 당산나무를 했음직한 팽나무와 소나무가 있는 모정을 지난다. 모정은 어른들 차지여서 근처를 가지 않았다. 모정 근처에 가면 영락없이 심부름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때로는 윷놀이하는 어른들 심부름값으로 5원짜리 뽀빠이를 노리는 요령도 없지는 않았다.

남향 양지에는 때 이른 봄을 알리는 연두빛 눈망울들이 첫사랑처럼 올랐다. 물을 대기 위해 만든 도수로가 들녘 한가운데를 지른다. 우리는 도수로를 수리조합이라 불렀다. 당시에는 수세를 냈다. 수세는 조병갑 만석보 수세처럼 농민의 원성이 높았다. 농민의 싸움으로 김대중 정권 때 폐지되었다.

   
유독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1월, 길 찾아 나선 그 날엔 바람은 순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 사진 이보삼

수리조합물에는 빠가사리가 많았다. 마을의 조무레기들이 한 냄비를 잡으면 어른들이 술추렴을 했다. 때로는 어른들 몰래 냄비를 끓여 소주나 막걸리를 홀짝거렸다. 술을 녹이지 못 하던 새가슴이어서 아지랑이가 피곤 했다.

이윽고 마지막 걷기 지점인 백산저수지에 왔다. 고니떼들이 겨울 저수지를 유영하고 있었다. 흰 고니떼들의 한가로움과 평화가 가득하다.

한가로움과 평화에 잠기다보니 겨울의 짧은 해가 서편 지평선으로 넘어간다. 사위가 어둑해졌다.
/ 강주영 편집위원 (2018.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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