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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제의 진보 오늘의 정체<신년기획>전라도 정도(定都) 천년...'동방의 등불'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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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1  10: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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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합작하고 천하대동(天下大同)으로 가자 하였다. 

앞서 말한 천하대동을 국민에 적용하면 국가라는 우상을 섬기는 국민이 된다. 민족에 가면 상상의 공동체 민족을 섬기는 민족주의자가 된다. 천하에 적용하면 천인합일의 세계가 된다. 국민이나 민족이 아닌 천하적 존재가 된다. 트로츠키의 영구 세계 혁명이고 마르크스의 자본국가의 타파가 된다.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된다. 캉유웨이가 말한 대동서의 세계가 된다. 공맹이 말한 천인합일이 된다. 동학이 말한 인내천의 세계가 된다.

이 근간은 마을의 집, 시민의 집이다. 마을의 집과 시민의 집(이슬람에서는 움마)은 가상의 인터넷과 연결되며 세계제국을 만든다. 민본을 우위에 된 자치 평민의 민주주의로서 국가의 민주주의를 대체해 간다.(사학자 이병한의 사유를 내 식으로 편집했다.) 현실의 국가를 단박에 없애자는 허황된 꿈을 꾸는 게 아니다. 세계사의 조류를 면밀히 포착하며 국가를 점차로 점차로 대체해가는 마을과 마을의 세계화를 말한다. 근대 백년에 이은 또 다른 백년의 일이다. 

 

   
마을 공동체. 함안에서 재현된 두레. 

지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잠깐 잠깐만 살펴보고 오늘의 길로 되돌아온다.    
 
때로는 굶주리고 때로는 배불렀다. 허나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누며 마을의 자치평민들이 모든 것을 책임지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의 어른들은 삶의 지혜를 대대로 물려주었다. 그 지혜는 자연을 다스리는 지혜가 아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였다. 자연에서 식량을 얻고, 치료 받았다. 자연과 하늘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당대의 지식이 해결하지 못하는 천문의 변화나 질병 자연의 변화에 사람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산업화의 논리가 생태문명의 가치를 기복신앙의 미신으로 치부했다. 삼신할미가 점지해주어야 생명이 난다고 했다. 삼신, 즉 삶의 신이 사람으로 태어나게 했다고 믿었다. 이 얼마나 경건하고 모든 생명이 하늘이 아니겠는가? 동학(東學, 종교 동학이 아닌 西學과 대비되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이다. 지금은 생태문명을 건설하자는 구호가 넘친다. 옛은 고도의 생태문명 사회였다. 고금합작의 법고창신이 필요하다. 

부족장이나 민족장(흔히 추장이라 업신여기는), 촌장은 마을의 존경과 관습의 권위로 마을을 이끌었다. 권위는 권력이 아니었다. 그건 지배가 아니라 자치평민들의 삶의 방식이고 지혜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어느 곳에선가 사람들은 식량과 생산물을 창고에 쌓기 시작했다. 건장한 남자들은 지배세력의 전쟁에 불려나가 다른 자치평민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군인이 생기고 법률이 마을 어른들의 존경과 권위에 의한 자치를 신분제적 억압과 특정집단에 의한 강압적 지배로 바꾸었다. 전쟁포로, 범죄자, 통치자에 대항한 자 들은 대대손손 노예가 되었다. 자치평민과 공동체에 의한 교육은 지배집단의 통치이념 교육으로 바뀌었다. 지배집단의 지배를 대리 집행하는 전문 집단인 관료가 발생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치평민이 자치적으로 하던 일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는 허가를 내주고 큰소리를 치며 세금을 걷는 일이었다. 귀족 내지는 지배세력, 평민과 노예로 사람들의 세계가 갈라졌다. 

낙원의 세계 에덴동산에서 어디 경계선이 있어 뉘 땅이며 내 땅이었을까 ? 천하는 오로지 약육강식의 힘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갈라지고 너와 나의 것이 되고 세습되었다. 세습을 위해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동맹을 만들고 지배체제를 유지하였다. 지배계급이 출현한 이래로 이런 지배의 본질은 노예제, 농노, 봉건, 아시아적 중앙집권적 왕조국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역사상의 매시대마다 한결 같다. 천하대동이 사라지고 권력으로 쪼개졌다. 

 

   
전주 한옥마을. 눈 내린 길목이 고즈넉하다. / 뉴스1

상비군, 관료제, 세금, 영토, 피통치인민을 가지고 외부에 대해서 배타적 경계와 통치권을 가진 중앙 집권화 된 권력체제인 국가는 이렇게 출발하였다.

국가는 천하대동 상실의 결과이다. 그러나 오래된 천하대동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겠는가? 마을의 관혼상제와 두레 노동에서 보는 것처럼 문명 속에는 천하대동이 남아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천하대동의 공동체를 없앤다는 것은 곧 왕조의 자멸이었으리라. 이것이 근대의 단독자적 개인주의와 자유로 원자화되고 노동과 주거가 분리되는 근대 산업화에 이르러 사라졌다.

가난은 오로지 개인의 무능력으로 이야기되었다. 머슴으로 부릴망정 옛 공동체에서는 초가삼간 움막이라도 지어줬다. 관혼상제가 마을에서 끊이지 않아 거지도 굶지 않았다. 오늘은 홀로 고독사한다. 

 

오늘의 도시 마을에서 옛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을 찾아야겠다. 관혼상제의 마을로의 귀환, 도시 마을의 공동 노동 마을작업장을 만들겠다. 모든 도시마을에 마을의 공유지를 확보해야겠다. 그렇게 도시계획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지배 계급의 정치위원회’라 불렀다. 국가는 사회의 여러 구성부분에서 가장 지배적인 구성체이다. 유무형의 문화, 관습, 제도 등으로 맺어지는 인적인 관계의 구성체인 사회에서 태어나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의 출현은 곧 지배와 피지배세력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가는 마을이나 자치평민이 가지던 자치 권력을 폭력적으로 한데 모은 즉 중앙집권화한 배타적인 권력이다. 동시에 이는 곧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출현을 의미한다. 배타적인 권력의 확보는 누군가의 자치평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잉여의 소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세력의 배타적 잉여가 굶주리게 된 피지배세력의 저항을 촉발하면 국가는 정복전쟁을 벌여 그 전리품으로 자국의 평민들을 진압하곤 하였다.   

전문 관료 집단이 대행하는 행정 업무는 사적인 개인의 소유가 없던 시절에는 자연 마을회의나 자치평민회의에서 관습에 의해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 세금, 소유, 상속이 없으니 이를 집행하고 증명하는 전문 관료 집단이 있을 수 없다. 범죄의 판단 역시 마을회의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니 사법권 역시 별도의 전문 집단에 의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마을회의(민회)의 기능들이 배타적 소유가 확립되면서 전문 집단에 위탁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위탁되던 것들이 스스로 자기 권력을 확보하면서 이제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전문 집단은 무엇인가 ? 이는 공동체에서 모두가 향유하던 것을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권력 내지는 배타적 지식이지 않겠는가? 사회의 태내에서 잉태된 권력이 이제는 그 자신의 출생지인 사회를 지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과정에서 발생한 강자가 점차로 약자를 지배해가는 과정으로서 성립된 것이 국가이다. 국가는 흔히 설명되는 사회계약에 의해 탄생된 것이 아니다. 

하니 비록 투표의 민주주의로 선출된다고는 하지만 직업정치인 제도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직업정치인은 배타화된 전문 권력이다. 하여 오늘날 일부에서 자원자에 의한 무작위 추첨식 의회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법원의 시민배심제가 그 흔적이다.

그렇다면 국가, 지자체, 공공기관의 각종 전문위원회에 대해서도 생각을 달리할 수 있다. 즉 선출직 의원과 달리 해당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의 자치평민이 추첨으로 뽑혀 참여하는 시민평의회를 구성해봄직도 하다. 전문가 위원회는 시민평의회에 구속된다. 나라면 시청, 도청의 수십 개 위원회에 시민평의회를 구성하고 학자, 교수 등의 전문가 위원회는 자문기구로 설치하겠다.  마을의 정치 기능을 회복하는  마을공화국을 만들 필요가 있다.     

 

   
밀양 백중놀이. 

그러나 국가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지난 농업사회만 하더라도 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공동체의 자치를 유지하였다. 토지의 소유가 왕조국가이든 지주 혹은 귀족이라도 농지의 점용은 소유를 앞섰다. 또는 공동체의 소유였다.

조선 왕조 국가 후기의 이전에 비해 가혹해진 토지 수탈 체제를 기준으로 보면 1/10은 국가에 조로 바치고, 4/10는 토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쳐 결국 수확의 반절을 국가와 지주에게 바쳤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일반적인 연구 결과이다. 이외에 군역 및 부역 등의 각종 책임을 진 농민의 처지는 비록 자영농이라 하더라도 신분제의 예속으로 사실상 농노라 할 수 밖에 없는 가혹한 것이었다. 

 

위와 같은 가혹한 수탈 체제일망정 동아시아의 한국에서 500년 이상을 가는 왕조국가가 유지되었다. 농민 공동체와 왕조국가를 등에 업은 지배계급이 서로 공존할 수 있던 농업노동공동체에 자치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아닌 공동체의 자치 질서가 가지는 영역은 오늘날의 언어로 하면 입법, 사법, 행정, 복지, 교육, 노동 등 전 분야에 걸쳐 있었다. 향약(鄕約)으로 불리는 지배계급인 양반세력의 향촌 자치질서와, 촌계(村契)와 두레 같은 노동공동체 같은 평민들의 자치 질서가 공존하였다. 

이중권력체제이다. 법고창신하되 국가권력, 의회권력, 사법권력, 언론권력, 자본권력에 대등한 민촌 권력체 즉 마을회의와 직장평의회를 헌법기관화하겠다. 대한민주공화국은 마을과 직장평의회를 공화정의 기본으로 한다. 이런 헌법 조문을 만들 수 있는가? 고금의 합작이다. 마을공화국의 회복이다. 

 “촌계나 두레는 마을의 전 경지면적을 공동으로 경작하고 과부나 병자, 노약자 등은 무상으로 하여 두레 공동노동의 사회보장적 혜택을 부여했다. 또한 남의 논밭 경계를 침범하는 자, 남의 관개수로를 훔친 자, 게을러서 양전을 썩힌 자 등은 처벌되었고, 산림도 마을의 공유 재산으로 인정하여 공동으로 관리했으며, 기타 영농이나 생활상의 분쟁을 조정 해결하였다. 또한 도난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면 촌계에서 돌보았고 심지어 과년한 처녀 총각의 혼사 문제까지 주선하여 마을은 흡사 대가족과 같았으며, 특히 상선벌악(賞善罰惡)에 치중하여 도의선양에 힘써 효자 열녀 등이 나왔다.

-중략-

촌계는 거의 모든 마을에 있었던 아주 보편적인 사실이었다. 촌계에서 서낭제 등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사를 주관했고, 두레 등 공동노동을 조직하여 운영했으며, 두레놀이며 마을굿 등 유흥과 공동오락을 즐겼으니, 이러한 공동체적 생활을 통하여 마을은 한 가족과도 같았다. 제언(堤堰:댐)·도로·교량·동사(洞舍)의 수리, 도정(淘井:샘을 치는 일)하고 병약자를 돌보며, 혼인과 초상에 관한 일을 서로 돕고, 마을 전체를 흐뭇한 인정으로 묶어 주는 전통적인 관습에 어긋나는 자는 벌을 주는 등 동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벌에도 치중하여 마을은 한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역사 > 조선시대사>향약,촌계)

 

   
종묘제례.

이를 어찌 옛이라 하여 버리겠는가? 도시 마을에서도 충분히 실현가능한 방도가 있다.

토지는 명목상으로 국가의 소유이고 사사로이 매매하고 세습되는 사유지라 하더라도 경작권은 농민에게 있었다. 신분제적 억압의 질서도 이 농업공동체의 자치질서와 경작권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지주라 하더라도 마을의 규범과 관습에 어긋나는 소작제도를 시도하지는 못하였다.

노동공동체는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세력의 수탈로부터 평민들을 보호하는 사회체제였다. 인력과 가축이라는 생산력의 한계로부터 생산을 위한 생존의 지혜였다. 여기에 씨족적 특성과, 함께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동하는 삶의 동일성, 즉 삶의 구역과 생산 구역의 일치는 공동체의 특성을 더욱 강하게 발현시켰다.

그들은 마을총회인 민회를 열어서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였다. 논밭에 이르는 관개수로를  만들고 관리하였다. 유목 자치평민에게서 초지는 어느 자치평민이라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초지에 휴식기간을 주었다. 하여 이동을 한다.

초지를 사사로이 독점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마을의 창고에는 누구나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와 장비들이 있었다. 마을의 대소사 행사나 장례식에는 공동의 물품들이 이용되었다. 특히 장례는 마을 공동의 행사였다.

남자들이 전쟁에 징집되었을 때에도 마을의 여자들과 촌로와 어린이들은 농사를 짓고 마을을 지켰다. 마을사람들은 이웃집 굴뚝의 연기를 보고서야 편히 잠들 정도로 마을의 누군가가 굶주리는 것을 불편해 하였다. 바닷가의 어촌에서는 갯벌과 바다를 공유자원으로서 공동으로 이용하고 관리하였다.

지배계급이 마을의 공동체를 침범하지 않으면 수탈체제의 저 밑바닥에서는 언젠가는 터질 모순이 꿈틀댈지라도, 평화는 유지되었다. 왕조국가는 농민의 수탈을 기반으로 태평성대의 번영을 누렸다. 왕조국가와 귀족, 지주들도 이 공동체의 질서를 깨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불리하였다.

지배계급의 처지에서도 향촌의 자치 질서는 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있어 굳이 반역을 꾀하지 않는 한 존치하는 것이 유리하였을 것이다. 농업노동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곧 세금 내지는 수확량의 감소였고, 이는 농민봉기를 초래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여 마을의 귀환이 요청된다. 도시 마을에서도 이런 원리의 현대화가 가능하다. 다음 회차의 글에서 이중권력체제 마을의 귀환은 더 자세히 적을 예정이다.  

 

   
전통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농민들.

농업노동공동체의 파괴는 곧 왕조국가의 몰락이었으며 현존하는 지배계급의 몰락과 다른 지배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왕조국가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마을의 노동공동체를 파괴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잦은 부역과 징병, 가혹한 세금, 지배계급의 과도한 수탈, 신분제의 가혹한 억압은 왕조국가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긴 역사에서 왕조국가는 유성처럼 빈번히 출현하였다가 사라졌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어느 곳이든  말기적 시대에는 구체제의 가혹한 수탈이 있었다. 동시에 구체제의 태내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의 싹인 노동과 분배의 방식, 삶의 양식이 성장하였다. 당대마다 선각자들은 이 새로운 체제를 찬미하고 설파하였으며 평민들은 봉기하였다. 

과연 근대 백년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하루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제 근대의 민주주의 경제 정치체제에 의한 의심이 퍼지고 있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모두 마찬가지이다. 허나 근대 백년의 시각으로 5천 년을 말할 수 없다. 새로 보고 새로 생각하여야 한다. 동서고금을 합작하는 사유가 일어나야 한다. 근대의 논리로 근대의 병증을 치유할 수 있는가?   

 

기술이 미약하던 지난 시기에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였다. 자연과 인간은 상호부조하였다. 그러던 긴 역사의 시간 동안 발전하게 된 인간의 지식은 새로운 도구를 발견, 발명하였다. 그 때문에 발달된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에게서는 자치, 자급, 자립을 넘어서서 이제 자연을 수탈하는 잉여가 축적되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은 기술의 발달로 인한 생산력의 급속한 증대, 신분제로부터 해방되고, 농업노동 즉 토지로부터도 자유로운 무산자로서 전문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탈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동시에 그 과정은 자연에 대한 회복될 수 없는 일방적 약탈이기도 하다.  

왕조국가와 봉건 영주 체제는 낡은 옷이 되어 새로운 잉여를 축적하는 신흥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화폐의 유통은 자립과 자급을 넘는 소비를 촉진하여 한편으로는 자영농의 몰락을 촉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잉여의 축적을 기반으로한 자영부농 및 상공업세력을 출현시켰다.

여하한 경로를 통해서 발생한 잉여생산품이거나 혹은 수탈물이었던지 잉여생산물은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켰을 것이다. 화폐와 잉여생산물의 축적은 새로운 계급을 출현시키고 농업노동의 자치공동체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가혹한 농노적 사회였을망정 향촌 사회가 가지던 자치, 자립, 자급이라는 공동체 질서는 파괴되었다

화폐유통은 새로운 농업노동에 기반한 촌락의 공동체가 유지하던 자치 권력 밖의 일로서 평민들이 관리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폐는 단순히 상품의 등가물로서, 사용의 편리성을 가지는 물건이 아니다. 화폐는 그 자체로서 자기 증식의 원리를 가지고 모든 생산물의 머리 위에 서있는 전능한 수탈의 지배자로서 기능하였다.

 

   
수시로 등락하는 가상화폐 비트코인 / 뉴스1

화폐는 국가가 요구하는 즉 국가의 뒤에 숨어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급이 원하는 내용으로 움직인다. 마을과 지역의 공동체가 가지는 삶의 양식을 변모시킨다. 하여 화폐의 공동체 파괴적인 중앙 집중성과 수탈성에 저항하는 지역통화운동이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스페인 인민전선정부 시절(흔히 스페인 내전이라 불리는)에 중앙화폐와 더불어 지역화폐가 발행되었다. 오늘날 EU의 유로화와 각 나라의 화폐 통용으로 비교하면 쉽겠다.

민간의 양심적 지역통화운동과 다른 체제적 개념으로서의 중앙화폐와 지역화폐가 같이 존재한다. 지역화폐의 존재는 지역이 지역이게 한다. 법률로서 지역화폐를 만들지 못한다면 지역상품권 같은 것을 정밀하게 설계해서 유통시킬 수 있다. 다 지역 자치 평민들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현행 법률을 고치지 않고도 할 수 있다. 필요하면 법 개정 운동을 하면 된다. 그게 진보이다. (다음 회에서 계속...) / 강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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