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하늘처럼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생각이 막히면 농민화가 소래 박홍규 화백의 그림을 본다. 만경들에서 고심하는 전봉준과 눈길을 지쳐 동지를 모으러 가는 전봉준을 그린 그림이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오늘의 전봉준들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전북포스트에 연재 기획을 해놓고는 후회도 된다. 생각은 모자라지, 글은 앞과 뒤가 없어 부끄럽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20회를 생각한 글이 끝까지 갈 수 있으려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삶인데, 생각의 도끼질까지 하니 외롭고 고독하다. 허나 모자란 대로 보이고 보인 대로 또 다시 고심해야겠다.

소설가 이광재가 말한 것처럼 준비에는 끝이 없다. 일어설 때 일어나야 작은 눈덩이가 굴러서 커질 것 아니겠는가? 박홍규 화백의 고심하는 전봉준 그림을 보면 힘이 나기도 한다. 강 목수의 고심이 바람이 찬 만경들의 전봉준의 고심만 하겠는가?(이글에서 동학(東學)은 종교 동학이 아닌 서학(西學)과 대비되는 동학이다.)

만경들에서 고심하는 전봉준 / 박홍규 판화

고심하던 차에 소설 「나라 없는 나라」로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광재가 자신의 고심을 보내왔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콕콕 찔러댄다. 뼈를 저민다.

․ 근대가 한계를 보이고 문제를 야기한 점이 인정된다 하여 그간의 것을 모두 부정하고 새로 세워야 한다는 것인지?
․ 따라서 근대의 이념을 넘어선 전환은 반드시 동양적인 것이어야 하는지? (이것은 혹 뒤집힌 오리엔탈리즘은 아닌지?)
․ 서구의 최근 내적 사유는 무시해도 되는지?
․ 혹은 아프리카 같은 곳은 어떻게 되는지?
․ 미국과 다른 길을 가거나 틀어진 나라는 우리의 대안인지? 가령 이슬람의 미국 전초기지였던 파키스탄이 미국과 틈이 벌어지면 우리의 모델이 되는 것인지?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또 다른 패권국가인지? 선량한 제국주의가 되는지? 각기 다른 중국과 파키스탄은 어떤 동류(同類)의 카테고리가 되는지? 과연 (인도가)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리는 것을 새로운 세계상으로 볼 수 있는지?
․ 우리의 현실적 문제를 생략하고 미국과 등을 돌리고 독자노선이나 반미블록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한결같이 크고 무거운 주제들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고심이다. 답을 할 수가 없다. 모르기도 하지만 같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현재 6회에 이르는 전라도 정도 천 년, 새 천년의 일어섬 “동방의 등불 기획” 전체를 관철하는 고심이다.

이광재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동방의 등불 기획”을 시작하였다. 그가 같은 문제의식으로 고민하고 있음은 동행한 북만주 항일 답사 길에서 서로 확인하기도 했다. 이미 읽은 분도 계시겠지만 여기 다시 그 글의 일부를 다시 적는다. 여행기로 써진 감상문의 한계를 넘어 글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괄호에 글을 더하였다.

“삼국연의의 첫머리에 "무릇 천하는 합친 지 오래면 반드시 갈라지고, 갈라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친다." 하였다. 북만주 땅 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옛일이 모두 그렇다. 북만주의 독립군 항일답사를 하며 북방의 역사와 앞날의 운명을 생각한다. 한족의 역사는 만리장성 이남의 역사이다. 한족의 말대로 북방의 역사는 오랑캐의 역사이다. 오늘날 한족이 북방을 지배한다. 그렇다고 북방사가 중국사로 취급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대청제국 시기에 만들어졌다. 순수한 한족만의 땅은 작다. 흑룡강성과 길림성 그리고 요녕성의 동북 3성, 내몽골자치구, 서역의 신장위구르, 티베트 등이 여진족의 청나라가 새로 개척한 땅이다. 지금 마지막 북방 오랑캐의 역사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쓰고 있다. 북조선의 인민들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이다. 한족은 진, 한, 송, 명과 오늘이다. 중국의 전 역사를 반분하여 북방족들은 중원을 지배했다. 북방족의 역사는 역동적이다. 남과 북이 합친 북방족인 배달족이 흥기하자는 허황된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게 아니다. 북방 오랑캐는 이미 천여 년 전에 세계화를 실현했다. 인종적으로 여진, 말갈, 몽골은 한 핏줄이다. 중국과는 다른 아시아의 공공재로서 중화는 북방족에게도 저작권이 있다. 한족만의 것이 아니다. 조선도 소중화를 자처했다.)  

북방을 개척하고 나라를 세운 족속 중에 오로지 몽골과 우리 배달족만이 지금 나라를 가졌을 뿐이다. 모든 오랑캐(몽골에 오랑카이족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만주는 국경 없는 자들, 유목민의 땅이다. 동이, 선비, 흉노, 돌궐, 말갈, 여진, 거란, 몽골이 일어서고 졌다. 그들은 머물지 않고 달리며 흐르는 자들이었다. 머물지 않고 구름처럼 일어나 모여들어 달렸을 때 제국을 세웠다.

(유목민은 그 자체로 세계인들이었다. 제국의 원리가 대영제국, 대불제국, 미제국이라 할 때의 그것과 다르다. 동방의 제국으로는 몽골제국, 무굴제국, 오스만 제국, 대청제국 등이 있었다. 이 제국의 축조 원리는 천하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제국 내에서 사실상 국가인 고도의 자치나라가 있었다. 각 부족이나 민족의 언어와 문화 종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도의 문명을 가진 조선이 칼로서 일어선 유목 여진족이 세운 나라를 인정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허나 여진족 훗날의 만주족이 세운 청제국을 조선이 거부하였던 것은 오판이었다.

전북 완주군 고산면 어우리에 위치한 '어우보(洑)'에 물이 막혀 있다. 흐르지 못하는 물은 썩는다. / 김대웅 기자

말 등에서 제국을 만들 수는 있으나 말 등에서 제국을 경영할 수는 없다. 과연 여진족은 중화(中華)를 흡수하고 중화로서 대청제국을 축조하고 경영하였다. 제국은 서로 각기 존재하되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천하무외(天下無外), 천하를 같이 공유하는 천하공물(天下公物)의 원리였다.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였다.

사학자 이병한 선생은 말을 들어보자. “기실 ‘중화사상’, ‘중화주의’라는 조어 자체가 20세기의 산물이다. 19세기의 문헌 어디에도 저런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ism의 번역 투이다. 허면 언제 등장했을까? 1930년대이다. 누가 만들었을까? 일본이다. 제국일본에서 발명된 신조어이다. 왜 생겨났을까? 일본의 대륙침략에 항전하는 중국을 폄하하기 위해서이다.” 중화주의 뿐 아니라 큰 것을 대하는 지혜라는 사대라는 맹자의 말을 사대주의라는 굴종의 언어로 만든 것도 일본이다. 조선의 독자 문명을 누르기 위해 교묘히 왜곡한 것이다. 

맹자(孟子)” 양혜왕편(梁惠王篇)에는 “大가 小를 섬기는 것은 어질음[仁]이요, 小가 大를 섬기는 것은 지혜[智]”라 하여 ‘事大’와 ‘사소(事小)’의 두 덕목을 나란히 놓았다. 이어 “小를 섬김은 하늘을 기쁘게 함이니 천하를 지킬 것이요, 大를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함이니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그 공용(功用)까지 설명했다.)        

몽골에 있는 돌궐의 장수 톤유쿠크 비석에 이리 적혀 있다 한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달릴 때 높고 낮음이 어찌 있으며, 일하는 자와 부리며 누리는 자가 따로 있겠는가? 국경은 일하고 사랑하며 키우는 자들의 경계가 아니다. 인민에게 어찌 경계가 있겠는가? 국경은 서로 물어뜯어 누리는 권력의 휴전선일 뿐이다. 그러나 도시를 만들고 신분을 세우고 연합한 부족이 종속적 군신이 되고, 말을 타지 않고 초원에 씨앗을 뿌렸을 때, 제국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국경 없는 자들이 국경을 그었을 때 국경은 무너졌다.

(제국들의 지배 부족이 교체된 것을 제국이 망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행기의 혼란은 있겠다. 겨우 근대 백 년의 시각으로 몇백 년의 제국을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국경은 상상의 공동체 민족에 기반한 19세부터의 개별 국민국가를 말한다. 국민국가는 천하를 공유하지 않았다. 천하를 각자 자기의 앞마당으로 나누었다. 자기들 멋대로 금을 그었다. 제국주의 국가와 속국이 넘쳐났다. 서방의 국민국가들이 누린 부와 복지의 원천은 식민 속국에서 가져간 것이다. 만일 식민지의 부와 노동이 없었다면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붕괴시키고, 주권 국가들의 정치공동체 즉 국민국가가 등장하는 게기가 된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후의 유럽 국민국가들은 이미 수백 번 무너졌을 것이다. 동방의 부와 아메리카의 부가 그들을 살렸다. 기실 오늘의 서구는 동방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굴제국(Mughal)은 이름부터가 몽골(Mongolia)에서 따온 것이다. 무굴, 오스만, 대청제국들이 서구의 근대 진격으로 무너졌다. 천하를 공영하던 왕도의 제국들이 패도의 제국으로 변이하였다. 만일에 서구식 근대의 역사가 동방에서 저문다는 평에 동의한다면 아시아의 근대 백년은 이행기의 혼란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근대 백여 년은 동방에서는 돌연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천년 제국의 동방에서 백년의 서구 근대는 짧은 시간이다. 

이는 서구의 근대를 무조건 버리자는 게 아니다. 서구의 근대가 그 힘을 다하고 부작용의 병증이 심해지는 시기에 서구식 좌우의 근대를 동방의 옛과 서구의 지금을 고금합작(古今合作)으로 통섭하자는 것이다. 역오리엔탈리즘이 아니다. 동방에서 제국이 만들어질 때는 항상 전국시대가 있었다. 아편전쟁은 동서 역전의 전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생산은 유럽을 넘었다. 무역적자에 시달린 서방은 동방의 차를 가져가는 대신 아편을 들이밀었다. 

 동방제국에서 시장과 교역은 당대의 형세로 보아 오늘날의 자유무역(FTA)세계를 넘었다. 신라에도 색목인이 들끓었다. 동방의 시장과 교역은 초원길, 실크로드로 연결되었다. 동방의 시장은 서구의 시장보다 더 오래된 천년 전에 이미 세계시장이었다. 이미 세계화는 천년 전에 달성된 것이다. 동방의 세계화는 속국이 없었다. 

신라의 장보고 상단이 대륙의 육로로 어디까지 갔을까? 참 궁금하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704~787)는 1300여 년 전에 이미 세계인이었다. 명대에는 정화가 있었다. 이슬람의 모로코에서 신드바드의 길을 따라 동쪽으로 원나라에 온 이븐 바투다(Ibn Battuta1304~1368)가 세계인이었다. 동방은 은둔지국이 아니었다. 동방은 제국으로 끊임없이 달리고 교역하였다. 자기들만의 것으로만 성을 쌓지도 않았다. 자기들만의 성과 국경은 근대 식민의 산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은 중화제국을 구성하되 독립된 일원이었다. ) 

먼 훗날 필경에는 동북아에 다시 새바람이 일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져, 흩어져서는 다시 모여 골짝골짝을 흘러가리라. 그때 경계는 무너지고 새 경계가 세워질 것이니,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작은 도랑의 합수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소비에트연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여러 나라로 일어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스페인에서 카탈루냐가, 멕시코에서 사파티스타가, 캐나다에서 퀘벡이, 미국에서 캘리포니아가 자치독립하고, 그와는 다르게 볼리비아, 콜롬비아, 페루 등이 볼리바르의 꿈처럼 연합한 남아메리카연방공화국을 세울지도 모르겠다. 

(근대 백여 년 서방에 역전되었던 동방은 지금 서방을 역전하였다. 이미 중국이 서구 근대의 모범생 일본을 추월하였고 미국도 넘어섰다. 아세안과 이슬람경제, 중화경제, 한국경제까지 합하면 서세동점(西勢東漸)은 이미 사망하였다. 더구나 이슬람이 자각하고 중국이 수천 년 문명의 터전에서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라 불리든 사회주의라 불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등소평은 말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생산력이 낙후되어 아직 진정한 사회주의에 진입하지 못한 상태이다. 1956년부터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 진입했으므로 이후 100년 동안은 생산력 향상과 경제발전에 매진해야 한다.”고 했다. 주은래는 프랑스대혁명은 시간을 더 지나봐야 한다고 하면서 서구의 근대에 의심을 가졌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유교사회주의 신유학운동이 점화됐다고도 한다. 경제발전을 위한 등소평 때의 선부론(先富論)이 중산층이 3억이나 되는 시점, 달리 말해 경제는 이루어졌지만 빈부격차를 드러내자 시진핑 시대에 와서는 선공론(先公論)으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기존의 사회주의 관념으로 사회주의가 폐기되었다고, 자본주의에 오염됐다고 말할 일도 아니다. 레닌이나 스탈린식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선공론 이후 향촌건설이 등장하면서 향촌 자치가 급속도로 번지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당이 배치하던 공무원을 실력주의 사회주의로 개방했다. 조화세계를 말한다. 그들 스스로는 70%의 농민에 기반한 쁘티 사회주의라 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겉모습만 보고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 시진핑의 일대일로가 세계의 패도가 될 것인지 왕도가 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여 불행히도 중국의 일대일로가 패도의 길을 간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었던 것이다. 아래와 같이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아편전쟁에서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근대 150년의 전쟁을 다시 치러야 한다. 중국공산당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길을 가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중국을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서구의 좌우 시각으로 양단할 일이 아니다. 저들 말대로 백 년은 두고 보라 하지 않는가. 가히 오천년 문명제국다운 장강의 시각이다. 하니 남북통일도 아시아의 새로운 일어섬 속에서 새로이 조명하고 크게 보아 설계해야 하리라. ) 

소래 박홍규 작 장흥덕도탈출도. "이들 동학인들은 사멸한 게 아니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오늘날 2개 특별행정구 4개 직할시 23성 5개 자치구 30개 자치주 56민족 13억 인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언제까지나 갈 것인가? 중국이 오늘날의 성장에 안주하고 공산당이 썩어 중국인민들의 빈부 격차가 심할 때에 반드시 갈라지고 동북아에 새 질서가 생길 것이다. 56민족의 어디에서인가 신민족주의가 발호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국민)국가가 넓고 강성하면 다른 국가를 물어뜯으니 국가란 작을수록 좋다. 크고 넓음을 부러워 할 일이 아니다. 국가란 만개 마을공화국의 연합의 연합이고, 이 연합은 언제든 마을공화국의 뜻에 따라 달라진다. 연방은 고정체가 아니며 흐르는 것이다. 아나코코뮌주의 연방원리가 이러하다. 마을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고, 연방은 자유로운 마을의 연합이다. 국가는 한 없이 낮아지고 마을은 한 없이 커져야 한다. 

(아나코코민주의의 원리는 중화제국할 때의 제국의 원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소련의 코민테른은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원래의 사회주의 국제주의 원리와는 다르다. 유라시아제국(EU의 유라시아판)이 만들어진다면 지금의 각 국민국가들은 제국의 독립된 일원이되 제국의 마을들이 될 것이다. 그 유라시아제국의 꿈이 천하무외, 천하대동의 정신이어야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만주에서 이 글을 쓸 때는 천하대동을 떠올리지 못 했다. 하여 연방이라는 서구의 언어를 썼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사실 연방국가의 원리는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이 아메리카 선주민, 즉 아메리카 인디언 민족들의 연합 원리에서 차용한 것이다. 연방은 연합의 연합이다.)

 
흑룡강에서 나는 국제주의 아나코코뮌주의를 곱씹는다. 일본 대학생 게무야마 센타로가 1902년 얼치기로 오역한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나는 아나키민주주의를 꿈꾼다. 내가 충성할 국가는 없다. 나는 인민이며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에 충성할 뿐이다. 내게 국가의 식민 국민은 없다. 일하는 인민이 있을 뿐이다. 위대한 당과 수령의 령도가 아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지도도 아니다. 나는 외친다.

"인민은 말한다. 국가는 따르라"

내 잘라진 반도에 웅크려 머물러서는, 서로 물어뜯는 자들의 좁은 국경 안에 있으니 태산처럼 답답하여 한탄한다. 당대의 실현이 아니더라도 훗날 "광야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을지니 우리 어찌 근본의 꿈을 놓칠 것인가! 훗날의 세대에 물려줄 씨앗을 광야에 어찌 뿌리지 않겠는가! 당대의 혁명이 늙고 지쳐서 고물장수도 안 가져갈지라도 나는 최후의 혁명주의자이기를 놓지 않는다. 홀로 소진하여 바라보는 이 없어도 어찌 사랑을 버리겠는가? 우리는 흑룡강에서 하얼빈을 향해 다시 북방을 달렸다.

(오늘의 혁명은 볼세비키의 시월 혁명처럼 급격한 정변은 아니라고 본다. 혁명은 느리게 진행되지 않겠는가? 제3의 당이 선거로 집권한다고 해도 급격한 변혁은 어렵다. 그것은 곧 바로 무력 내전으로 가는 길이다. 폭력적 혁명은 거부한다. 느린 혁명은 그러나 각각의 단위에서 자치꼬뮌들을 성립시킬 것이다.  몇십 년은 자본주의, 기왕의 사회주의, 새로운 제3의 그 무엇이 각기 대립하며 때로는 협력할 것이다. 하나의 모범이 인민들의 지지를 얻으면 어떤 것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소멸할 것이다. 어떤 경우는 자연 소멸이 아니라 부러 폐기되는 것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다고 장담할 수 없다. 어쨌든 역사는 진화할 것이다. 후쿠야마처럼 역사의 종언은 없다.)   

동지를 모으기 위해 눈길을 지치는 전봉준 / 소래 박홍규 판화

다시 북만주에서 전주 한옥마을의 오늘로 돌아온다.

대동이니 고금합작이니 하는 글을 두고 "ML주의자 강목수가 변했네." 한다. 변한 것 맞다. 하지만 초심은 그대로이다. 당대의 지성들이 하지 않으니 초야의 헐거운 목수가 고심한다. 
 
고민하는 것은 좌우 양측면에서의 "민주, 자유, 평등이 다른 대체제 없이 그 자체로 무한 진화하는가? 다른 종들의 체제는 발생하여 진화하지 않고 사멸하는가?"이다. 하여 약육강식의 진화판에서 오늘의 자유, 민주, (사회주의적) 평등의 최종 승리를 선언해야 하는가? 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종들 중에서 한쪽에 서야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종언이라고 후쿠야마처럼 외쳐야 하는가? 아니면 역사가 진화하여 다른 그 무엇이 서구적 민주 자유 평등을 대체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알려진 바처럼 예기에 나오는 대동사회는 추상적 수준에서 공산주의와 같다. 강 목수는국가가 절대이성의 담지자라는 헤겔류의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자본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독재를 절대이성의 담지자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는 동의하지만 그것들이 절대이성의 담지자가 될 수는 없다. 하여 미래의 어떤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여야만(일수도 있지만) 한다는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대 로마의 민주정도 사라졌다가 절대군주, 귀족, 젠틀계급과의 타협책에서 오늘의 의회가 나온 것처럼, 오늘의 관점에서 자유, 평등, 민주를 진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양이 누적되어 질적으로 새로이 변화한다는 즉 양질전화(良質轉化)한 다른 그 무엇인가를 사유해야 하는가? 하여 경제로서의 자본주의가 반드시 (역사상의) 사회주의로 발전해간다는 필연적 사적유물론도 의심한다.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과학이 역사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아니 역사에 어떻게 과학이 있는가? 인문에 과학을 붙여 인문과학이라 하는 게 가능한가? 하여 하늘 아래 새것이 없으니 옛것에서 다시 양질전화하여 새로운 무엇이 탄생할 수는 없는가라고 질문해 본다. 

우리의 사유가 좌우가 분단된 것처럼 고금이 분단된 것도 문제이다. 철학에서의 자유가 오늘날 시장의 자유로 권력화되었음은 사실이다. 그것을 (참)자유가 아닌 자본의 방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체제가 인과율로 필연적으로 자본의 방종을 권력화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없다는 말과 같다.

탈아입구 서세동점한 (좌우 모두에서) 근대의 사유를 동방으로 회심하여 고금을 합작하는 사유를 해보자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 백년을 모조리 없애자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서구적 근대의 백년인 금과 옛을 합작하자는 것이다. 옛은 낡아서 사라지는 게 아니고 살았기 때문에 옛이다고 혹자는 말했다.   

과연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지금의 우리는 개화파 김옥균의 후손이다. 개화파의 좌측에서는 서구적 민주의 성취를 이루었다. 개화파의 우측에서는 서구적 산업화를 이루었다. 그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였다.

그렇다면 전봉준의 후손들은 무엇을 이루었을까? 그들은 사멸했는가? 아니 역사투쟁으로 다시 천운을 기다리는 은둔지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장흥 덕도를 탈출한 동학인들은 다시금 돌아올 것이다. 하여 강 목수는 김옥균과 전봉준이 만나지 못했던 것을 통탄한다.

호남평야 항공촬영 / 문요한 기자

전봉준 아니 당시의 동학(종교 동학(東學)이 아닌 서학(西學)과의 대비에서)은 고금을 단절하여 오늘의 삼권분립 민주정과 산업화를 꿈꾸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당시의 동학은 사대부의 유학이 새로이 창조되어 전 인민화한 것이라는 이병한의 주장에 공감한다. 하여 전봉준의 동학은 고금의 단절이 아닌 지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양반을 싹쓸이하지 않고 연합전략을 썼으니 전주화약이다. 집강소이다. 파리코뮌처럼 당대의 지배 계급을 일소하자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구악과 손을 잡았다. 하여 혁명성이 없다는 것은 레닌의 말을 빌면 ‘좌익소아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늘날의 사회주의적 성향의 좌파들이 입맛대로 전봉준에게서 혁명성만을 호출하여 각색하는 것도 못 마땅하다. 그들이 꿈꾼 이상향이 서구의 자유, 민주, 평등이 아닌 인내천(人乃天)의 천하대동(天下大同)이었다면 그것의 실학으로서의 실사구시적인 체제는 무엇이었을까 고민한다. 쉽게 끝나지 않을 몇십 년의 일이다. 아니 몇백 년이 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디엔가 동패들이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

과연 역사는 종언이 아닐 것이다. 바람 찬 만경들에서 고심하는 전봉준과 동지를 모으러 눈길을 가는 전봉준을 떠올린다. 소래 박홍규 화백의 고심이자 강목수의 고심이고 소설가 이광재의 고심이다. 소리꾼 고양곤의 고심이다. 굿쟁이 잡놈 김석균의 고심이다. 다문 소춘수의 고심이다. 또 무언의 동패가 있거늘 어찌 이 밤이 고독하다고만 하겠는가! 

그대를 하늘처럼 모시고 오늘도 안녕하십시오. / 강주영 편집위원

* 사학자 이병한의 사유를 많이 빌렸다. 여기에 다 적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