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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밀영에는 가랑잎만 구르고 <강주영의 '만주항일답사'>
강주영 편집위원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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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6  1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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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가시내야, 남쪽도 이제 단풍이 지더냐? 자작나무 이깔나무 헐거워진 북만주숲 동북항일연군 밀영에는 가랑잎만 구른다. 북만주의 가을이 지고 겨울 눈꽃이 핀다. 밀영 숲그늘에서 바라보니 찔레꽃 피던 남쪽은 어디던가? 별빛에 고개를 넘고 달빛에 들을 가로질렀다. 전라도 가시내야 ! 복흥하 차가운 볕에 너는 어찌 또렷히 떠 오르더냐...

 

   
십리평 마을 원경과 연성사관학교가 있던 구릉 낫덕.

북만주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북로군정서 터에서  나는 동행한 소설가 이광재의 소설 「나라 없는 나라」의 문장을 떠올렸다. 

“ - 이 나라는 너희(상놈)따위가 활개칠 나라가 아니다. 지금은 비록 병장기를 가졌다 하나 장대 끝에 목이 걸리는 날이 올 것이다.
- ...... 정법이 시행되어 억울한 일이 없게 되거든 우리는 향리로 돌아갈 것이오..... 도적이 재산을 훔치는데 허울 뿐인 집안의 규율을 탓하시렵니까? 
- 감사(김학진)의 머리는 해 아래에 매달리고, 적괴(전봉준)의 시체는 달 아래서 찢길 것이다.” 

나라를 팔아 먹은 이가 누구이던가? 동학농민혁명군으로 장대 끝에 목을 건다고 한 이가 바로 매천 황현이었다.(오하기문) 매천 황현이 지키자한 것은 양반의 나라였지 상놈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장대 끝에 목이 걸려야 할 무지랭이(?)들이 봉금의 만주(1881년에 해제), 조선이 버린 만주를 일구고 독립군부대를 이루었다. 1920년 경에 조선인은 약 65만 명에 이르렀다 한다.

 

   
왕청현 동북항일연군 밀영 입구의 기념비, 혁명박물관이 건립 중이다.

우국지사 인물 중심의 임정에서 독립 투쟁을 두고 허울 뿐인 말들이 허공에 흩어질 때 북만주 왕청현에서는 2,000여명의 독립군 무장 부대가 1919년에 조직되었다. 바로 북로군정서이다.

십리평에는 북로군정서 사령부가 들어서고 북쪽 산기슭인 낫덕에는 연성사관학교를 두었다. 8동의 막사가 있었다고 한다. 십리평이나 낫덕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고 안내 간판조차 없다. 십리평 마을로 복흥하가 흘러 부르하통하를 만나고 다시 해란강과 합쳐 두만강으로 흘러간다.

 

   
일본공산주의자로서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가책을 느껴 자결한 일인 이다스께 기념비 그는 많은 탄약을 독립군에 남겼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명색이 사회주의국이라 대종교 세력이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를 홀대하여 안내간판조차 없는 듯 하다.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근거지인 왕청현 숲에는 그 보다 앞선 중국공산단 항일 동만특위 밀영을 복원해놓은 것과는 비교가 된다.

기실 북로군정서는 청산리 전투 이후에는 해체된다. 이후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구성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계열은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 홍군이나 소비에트(소련)와 연대하게 된다.

 

   
독립군비와 안내 비석들.

1936년 왕청현 일대에서는 중국인과 조선인이 연합한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된다. 활동이 활발한 때에는 병력이 1만 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북한 정권 주요 수립자인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활동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이라 하여 남한에서는 무시하나 독립운동의 평가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 

북로군정서 터 십리평 마을과 연성사관학교 터 낫덕을 둘러 본 일행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가 복원해 놓은 동만특위 밀영(왕청현)에 들렀다. 밀영은 숲속의 비밀스러운 군영을 말한다. 자작나무, 이깔나무, 백양나무, 참나무, 소나무 등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였다.

 

   
왕청현 동북항일연군 밀영 지휘소, 탄환창, 인쇄소 등이 있다.

밀영에는 지휘소, 인쇄소, 탄환제작소, 교육장, 우물 등이 귀틀집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항일부대를 지원한 정착 조선인들의 삶과 풍찬노숙한 독립군의 삶을 떠올리니 가슴이 애려 온다. 

동만특위밀영을 나와 산포수 출신 1,000여명으로 이루어진 홍범도 부대의 봉오동 전적지로 길을 잡았다. 홍범도 부대는 일군과의 싸움 뿐 아니라 러시아 내전에도 참여한다. 일제가 러시아 반혁명 백군을 지원하자 러시아혁명 적군과 연합하여 싸우기도 했다.

 

   
산포수 출신이 주력인 홍범도 부대의 봉오동 골짜기는  댐이 들어서 수몰되었다.

홍범도는 스탈린의 연해주 조선인 강제 이주 때에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가 극장 수위로 타계했으니 파란만장하다. 봉오동 골짜기에는 댐이 들어서 입구에서 산세만 살펴보고 돌아 나왔다. 

두만강 국경도시 도문으로 길을 잡으니 북만주의 짧은 해는 이미 노을을 짓고 있었다. 두만강 조중 국경에 밤이 내렸다. / 강주영 편집위원

 

   
영성사관학교가 있던 낫덕을 배경으로 선 강주영 편집위원(왼쪽)과 소설 <나라 없는 나라>의 이광재 작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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