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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혁명열사비 <강주영의 '만주항일답사'>
강주영 편집위원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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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6  11: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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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홍범도 부대가 이동한 의란구 마을. 

목로에서 단풍 물든 얼굴로 지짐거리는 비를 바라 흥얼거리던 전라도 가시내야, 너 깊은 눈그늘이 서러워서 두리번거리기만 하던 남녘 사내는 북방의 산골짜기를 누빈다.

자작나무, 이깔나무, 백양나무, 소나무는 매운 바람에 두런두런거리고 두만강가 버들꽃아씨는 노을에 젖어 떠는구나. 두 팔을 벌려 안으련만 총을 든 국경의 병사가 오락가락 한다.

부르하통하가 흘러드는 두만강 두물머리.

건널 수 없는 건너 편 함경도 남양 인민군 초소에는 연기가 오른다. 동백기름 바른 머리 곱게 쪽지고 흥그레하던 전라도 가시내야, 북방을 헤메는 사내는 눈시울이 붉다. 

 

   
 
   
백초구 일본영사관(위)과 한족 농촌 마을(아래)

북방의 장수 홍범도는 어찌 카자흐스탄 극장의 수위로 죽었는가? 

연길 첫날은 연변박물관과 서점을 방문했다. 일행은 둘째날 북로군정서, 홍범도와 김좌진 부대, 동북항일연군, 두만강을 찾아 나섰다. 지명으로 보면 의란구, 서대파 십리평 낫덕, 왕청, 도문의 두만강 등이 그 곳이다. 

몽골 초원의 늑대를 좆던 이광재 작가는 금세금세 항일유적지의 지명을 게워낸다. 

연길을 벗어나 동북방면으로 달린다. 많은 것을 보기 위해 고속도로를 버리고 일반도로로 갔다. 산골짜기로 난 도로를 따라 농촌  마을이 산기슭에 다슬기 마냥 달라붙어 있다.

 

   
조선족 농촌마을 조선족은 팔작지붕 한족은 맞배지붕으로 한다.

팔작지붕을 한 마을이 있고 맞배지붕을 한 마을이 있다. 무슨 차이냐 하니 조선족은 팔작지붕, 한족은 맞배지붕을 한다고 한다. 법이 아니라 자체적인 문화전통이라 한다.  

몇 개 마을을 지나 계속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마을마다 항일열사기념비가 있다. 북만주 전역이 항일근거지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무명의 독립군들이 그 얼마나 많았으랴? 독립군하면 유명한 분 스무여명이나 겨우 기억하는 처지가 부끄러워졌다. 

1986년 8월, 중국 시인 하경지는 연변을 돌아보고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혁명열사기념비라, 붉은 마음 나래펴니 연변은 궐기한다.(山山金达莱 村村烈士碑 红心振双翼,延边正起飞)'는 불후의 시를 남겼다. 모택동은 말하기를 중국오성홍기의 붉은 별에는 조선인민의 피가 스며있다고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주근거지였던 왕청현. 이곳에서 북로군정서가 있던 십리평은 30여분 거리다. 

조선인들은 청이 봉금하고 조선이 버린 북만주에 이주해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었고 마을을 만들고 도시를 형성했다. 즉 북만주는 오랫동안 청이 봉금하여서 도시와 마을이 없던 곳이다.

조선인들은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최일선에서 막아냈다. 때문에 중국 홍군의 혁명이 가능하였으니 오늘날 북한을 홀대하는 중국을 북한이 "배은망덕한 무뢰배"라 하는 것도 그럴만 하다.

이곳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모택동이 조선인에게 무슨 선물을 주었으면 좋겠냐고 하니 북만주를 중국에서 독립시켜달라고 하였다 한다. 이에 모택동이 격분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북만주의 조선인은 이곳에 살아내고 자치주를 이룬 것만으로도 우리의 옛고토를 지켜낸 것이다.

 

   
십리평 가는 길의 항일열사비. 마을마다 항일열사비가 있다.

조선의 독립과 만주 고토 회복 두개의 독립전쟁이었던 셈이니 조선족을 홀대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크게 반성할 일이다. 

이곳에서는 임시정부를 장개석 국민당 정부나 따라다니던 세력이라 폄하한다고 한다. 사관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편성하고 농지를 개간하였다. 온 마을이 식량, 군수물자를 보급하고 일본군 토벌대에 짓밣히고 풍찬 노숙의 삶을 살았으니 임정이 한심하다 할만 하다. 사실 임정은 북만주에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는 게 사실이다.  

 

   
 
   

북로군정서가 있던 십리평 마을 입구와 마을 내부. 

청산리 전투 부대의 이동 경로인 의란구 백초구를 지나 서대파 십리평 낫덕으로 들어갔다. 길은 협곡이고 봉과 봉들이 이어지고 끊어진 곳에는 넓은 들이 있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오르기에는 가파라 보였다.

백초구에는 일본영사관이 있었을 정도로  크고, 주변에 마을이 산개해 있다. 연길에서 산길로 드디어 북로군정서가 있던 서대파 십리평에 이르렀다. 

복흥하강이 흘러 부르하통하를 만나고 다시 해란강을 만나서는 두만강으로 흘러가니 남쪽은 아득하다. / 강주영 편집위원

 

   
십리평 마을을 배경으로 선 강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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